과학자는 어떤 사람일까. 매사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사람?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가 그렇더라도, 〈랩 걸〉에서 그런 기대는 기분 좋게 깨진다. ‘랩 걸(실험실 소녀)’을 제 별명으로 내걸고 이 책에서 자신의 연구자 인생을 들려주는 호프 자런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니다.

자런은 빈틈이 많은 사람이다. 식물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 아이디어가 넘치고 자신의 도피처 겸 낙원인 실험실에 헌신적인 과학자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충동적이고 못 미덥고 교만한 데도 있는 사람이다. 앓고 있는 조울증은 사생활에서나 연구에서나 짐이다. 임신 중에는 향정신약물을 먹을 수 없어서 전기 충격요법에만 의지했고, 그런 탓에 그 1년의 기억이 흐릿하다.

그러나 그런 자런에게는, 마치 식물처럼, 자신을 위한 빛과 물을 직관적으로 찾아내고 그것에 기대어 성장하는 본능과 끈기가 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어엿한 식물학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남을 보살필 줄도 아는 한 인간으로 바로 선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연리지처럼 서로 꼭 붙어 의지하며 자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녀 인생 최대의 행운은 그런 사람을 찾아낸 것, 즉 영혼의 쌍둥이나 다름없는 실험 단짝 빌을 찾아낸 것 아닐까.

부족하고 아픈 사람도 성장할 공간을 잘 얻으면 좋은 직업인이자 친구가 될 수 있다. 자런은 결함투성이 씨앗이었다. 자칫 떡잎조차 틔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운이 좋다면 훌륭한 식물학자가 될 수 있는 씨앗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았고,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제 잠재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키우는 데 온 힘을 다했으며, 결국 성공했다. 줄기에는 무수한 상처가 나 있고 지금도 제 터전을 지키려고 주변과 맹렬히 싸우는 나무이지만, 이 나무가 아름답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랩 걸-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
알마 펴냄
인생은 힘들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잡아야 한다.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하나 잡아서,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자살하지 않고, 권태에 질식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자런에게는 그 무엇이 연구였다. 드넓은 이 세상에서 악착같이 실험실 하나를 꾸리고 그곳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랩 걸〉은 말해준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나무가 될 잠재력을 품은 씨앗이라고. 따라서 아주 다른 종류의 나무는 될 수 없지만, 제 속에 담긴 미래를 길러내는 것만은 검질기게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거기에는 많은 운과 도움과 고통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정해진 방법은 없다고. 환경에 때로는 적응하고 때로는 반항하며 그때그때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그 어떤 나무의 방법도, 그 어떤 사람의 방법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과학자도 예외가 아니라고.

기자명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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