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너도 네 직업을 좋아하긴 힘들 거야.” 일을 해봐야 냉대와 경멸만 돌아온다. 주민들의 방에서 나오는 불빛을 벗 삼아 제 숙소인 아파트 뒤편 쓰레기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하루는 고되다. 풀 HD 게임이 난무하는 요즘, 8비트 게임인 〈다 고쳐 펠릭스〉가 오랜 기간 퇴출되지 않은 데에 랄프도 한몫했다. 주민들 또한 그를 싫어하도록 설계되었을 뿐 그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는다.
2012년 12월19일, 그의 기대는 묵살됐다. 그날 게임 30주년 기념파티가 열렸다. 그는 초대받지 못했다. 대신 팩맨 게임 안에서 열리는 악역 모임에 나갔다. 힘들어하는 랄프에게 〈모탈 컴뱃〉의 케이노와 스모크는 프로그램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스트리트 파이터〉에 출연하는 장기에프는 역할에 연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말은 쉽다. 30주년은 랄프에게도 축하받고 싶은 날이었기에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렵다. 돌아온 마을에서 풍기는 달콤한 케이크 냄새와 흥겨운 파티 음악은 박탈감을 가중시킨다. 파티를 하고 있는 저 주민들보다는 제 역할이 이 게임에 더 중요하지 않은가!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이들에게 랄프는 낯설지 않다. 착하고 정의롭기만 한 현실은 없다. 다들 제자리에서 애쓰면 애쓸수록 사소하게 악역을 맡기 마련이다. 어떤 직업들은 노력할수록 공동체의 가치와 충돌해 쉽게 악당 취급을 받는다. 공공선에 부합하는 양쪽 진영이 각자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몹쓸 짓을 하기도 한다. 제게 주어진 소임을 해낼수록 죄책감과 비난이 따라올 때 그것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직업의 사회적 가치와 개인의 노력이라는 가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랄프처럼 죄인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나가든, 다른 방법을 찾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랄프는 악역 모임에서 “나는 나쁘지만 괜찮아. 나는 절대로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
“나는 절대로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어”
“주인공에게만 허락된 메달을 따와!” 함께하고 싶다는 랄프의 요청에 주민들은 악의적인 제안을 한다. 악역으로 설정된 이들은 메달을 결코 얻을 수 없다. 랄프가 태생적 한계를 딛고 메달을 따올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다른 게임에서 탈취해오는 것! 다른 게임에 설정 값이 없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오락실 생태계는 교란될 것이다. 설령 오락실 폐장 시간에만 이동해 운 좋게 다른 게임의 메달을 가져온다 한들 마을 사람들이 그 메달을 받고 랄프를 동료로 인정해줄 리 없다. 30년을 이어온 게임의 유지와 안녕을 위해서는 랄프가 제자리에서 인내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는 게임을 떠난다. 그 선택으로 유발될 ‘나비효과’는 생각지 않은 채, 30년을 단련해온 체력을 활용해 승부를 볼 수 있을 게임을 향해 한 발짝 내딛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은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을까? 욱하는 마음에 선택을 했지만 과정은 험난한 법, 그는 본의 아니게 〈다 고쳐 펠릭스〉를 오락실에서 퇴출당할 위기로 몰아넣고, 〈슈가러시〉라는 게임에 사이보그를 번식시켜 게임 세계를 붕괴시킬 뻔한다. 어쨌든 탄생 30주년 기념일을 화려하게 보내는 데에는 그럭저럭 성공한 듯싶다. 그의 선택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 결과는 2018년 11월21일 개봉 예정인 〈주먹왕 랄프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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