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00주년을 맞게 된 종교개혁(the Reformation)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이런 신화가 통용되어왔다. “젊은 헤라클레스가 망치와 못을 움켜쥔다. 그는 몇 번의 망치질로 한 교회의 문에 논제들이 적힌 큰 종이판을 단단히 박는다. 그러고는 인류를 근대의 개인적 신앙으로 이끄는 해방자가 된다.” 이 신화는, 종교개혁이 1517년 10월31일 루터가 작센 비텐베르크의 궁정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패트릭 콜린슨의 〈종교개혁〉(을유문화사, 2005)과 피터 마셜의 〈종교개혁〉(교유서가, 2016)은 루터와 연관된 종교개혁에만 정관사를 붙이고 ‘r’을 대문자로 바꾼 ‘the Reformation’이라는 차별적 특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종교개혁은 16세기 초에 벌어진 많은 ‘개혁(reforms)’의 결과라고 말한다. 실제로 교황 세 명이 난립했던 대분열 시기(1378~1417)를 전후해 교황의 최고 권위를 성서로 대체하고, 성직자의 세속적 권위에 반발하는 급진적인 교회 개혁 운동이 유럽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지영 그림

피터 마셜은 루터가 독일에서 벌인 활약에 특전을 부여하는 “단수(單數) 종교개혁”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며 “독일에서 전개된 루터의 운동이 실은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은 영국(존 위클리프), 보헤미아(얀 후스), 독일(토마스 뮌처), 스위스 (츠빙글리·칼뱅) 등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저마다 고유한 신학적·정치적 지향과 의제를 추구했던 복수의 운동이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왜 다른 지역에서보다 독일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느냐고 묻는 것은 공산주의 혁명이 왜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성사되었느냐고 묻는 것과 매우 유사한 중요성이 있다. 종교적 요인만 놓고 보면 후스파나 롤러드파(위클리프의 추종자)가 기세를 떨쳤던 보헤미아나 영국과 달리, 독일은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공식적인 도전이 거의 없는 나라였다.

종교개혁은 근대로 가는 티켓

유럽에서도 가장 경건한 정통 가톨릭 사회였던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성공한 이유는 독일의 후진적인 정치 구조와 민족주의가 맞물려 로마에 거점을 둔 교황의 권력에 분개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독일은 프랑스·영국·스페인에서 출현한 전국 단위의 군주국들과 달리 여러 공국·교회령·자치도시들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집권적 통제력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크고 작은 군주들은 교황의 권력에 취약했다. 그것은 교황이 군주를 제치고 독일 안의 교회 수장들을 직접 임명하며 그들을 통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힘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강했음을 뜻한다. 정치적 열세였던 독일 군주들과 국민은 이탈리아인 일색으로 이루어진 교황에 대한 격렬한 혐오증과 반교권주의를 동시에 표출했다. 종교개혁은 로마 교황청에 반발하는 독일 제후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루터를 보호했던 작센의 선제후처럼 종교개혁에 제일 먼저 진지한 열정을 보인 군주는 왕국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독일의 여러 제후들이었다. 이들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하고 교권을 축소해야 한다는 루터로부터 얻을 것이 많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들은 종교개혁을 내세워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도원과 교회의 땅을 강탈할 수 있었다.

독일 사례뿐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민족주의 의식의 발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종교개혁은 신교(Protestant)를 탄생시켰지만, 그보다 더 큰 공헌은 유럽에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위한 초석을 놓은 것이다. 피터 마셜에 따르면 근대국가의 발전을 위해 종교의 통제는 필수적이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생기기 전에는 오직 교회만이 전국을 통제하는 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설교나 주일학교 또는 교리문답과 같은 국민 교화 수단을 갖추고 있었다. 통치자들은 교회의 이런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하기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와 딴살림을 차려야만 했다.

비록 종교개혁이 종교사에 국한되지 않는 그 이상의 사건이라 하더라도,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면서 교회 개혁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주제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세가 급사한 날”로 불리기도 하는 바로 그날, 루터로 하여금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이게 만든 계기는 면죄부였다. 루터는 인간의 노력으로 속죄(또는 은총)를 얻을 수 있다는 로마 교회(가톨릭)의 오랜 신학적 관행을 거부하면서 “오로지 믿음으로써만(sola fide)” 구원될 수 있다는 신교 사상을 내세웠다. 이로써 로마 교회를 지탱해주던 성직제도·성인 숭배·순례·수도원 생활·고해성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성사(聖事)는 모두 신의 은총을 구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에게 다가가는 장애물로 추락했다.

패트릭 콜린슨은 인간 중심의 신학(가톨릭)에서 신 중심의 신학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호소를 “신학계에서 벌어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시작”이라고 썼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원시 종교에서 고등 종교로의 변화라고 설명할 수 있다. 원시 종교는 인간의 힘으로 신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단계로 무속(巫俗)이 대표적이다. 인간의 치성으로 비도 오게 하고, 병도 낫게 하고,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다니, 무속의 세계에서 신은 인간이 부리는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고등 종교에서 인간은 그저 신의 뜻을 따를 뿐이다. 막스 베버는 신앙 세계에서 벌어진 코페르니쿠스적 전도가 인간을 주술적 세계로부터 합리적 세계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루터와 종교개혁〉
김덕영 지음
길 펴냄
김덕영은 베버에 깊숙이 침윤된 학자답게 ‘중세의 주술적 세계로부터 합리적 근대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확고한 관점에서 〈루터와 종교개혁〉(길, 2017)을 썼다. 그런데 신교가 탈주술을 완수했다는 베버의 입론은 가차 없는 검증이 필요한 의심스러운 주장이다. 루터는 자신의 신학적 원천을 교회가 아닌 성서에서 찾았는데, 200년 전에 미국의 흑인 노예제를 찬성했던 목사들과 인종차별주의를 지지하는 오늘날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근거로 삼는 것이 성서다. 또 낙태와 동성애 반대 운동을 펼치는 기독교인들이 근거로 삼는 것도 성서이며, 박성진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가 ‘지구 나이 6000년 설’을 따르는 근거도 성서였다. 오늘날의 개신교 안에서 성서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주장과 종교개혁이 합리적 근대를 예비했다는 베버의 주장은 서로를 배격하는 무관한 이론이 되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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