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둘째 녀석이 입대했다. 이로써 우리 집 남자 3대 4명은 모두 대한민국 군번을 가지게 되었다. 복무 기간을 합치면 13년에 육박한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된 뒤 냉전은 종말을 맞았으나 한반도 양쪽은 정신없이 역주행하는 중이다. 이대로 가면 내 아들의 아들까지 군대에 가지 말란 법이 없겠다. 북한과 더불어 지구상 그 어디에 이렇게 끈덕지게 의미 없는 짓을 되풀이하는 곳이 또 있을까.

늦둥이여서인지 첫째가 입대했을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며칠 뒤 무심코 아이의 방에 들어갔다가 평소 즐겨 쓰던 안경을 발견했다. 군에서는 뿔테를 써야 한다고 해서 집에 놓고 간 것이다. 아이의 물건을 보는 순간 말 그대로 ‘심쿵’했다. 항상 품고 있던 자식의 부재를 실감했다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돌연 세월호 참사로 가족과 생이별한 유족의 심정에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데) 그분들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참 오랫동안 꿈이란 걸 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잘난 절차 민주주의조차 지켜내기가 힘들어 쩔쩔매지 않았던가. 간신히 군부 독재를 청산하고 민간 정부 아래에서 소중히 싹을 틔워가던 평화와 인권, 그리고 환경을 향한 관심이 마구 짓밟히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였을 터이다.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고 냉소 의식만 한없이 부풀려가던 게 겨우 1년여 전 일이다.

ⓒ한성원 그림

그 암담한 때에 우리는 촛불을 들어 역경을 헤쳐 나왔다.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법 절차를 밟아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를 감옥에 보냈다. 깨어난 국민이 가장 무서운 무기라는 점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꿈꿀 여유를 찾았다. 행복이란 어쩌다 얻어 걸리는 로또가 아니라 우리가 당연히 국가로부터 찾아 먹어야 하는 권리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려면 코스타리카의 초등학생과 얘기해보기를 권한다. 일본인 프로듀서 아다치 리키야가 제작에 참여한 유명한 다큐멘터리 〈군대를 버린 나라〉에서 코스타리카의 초등학생 5학년 소녀는 평화가 뭐냐고 묻자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민주주의, 인권, 환경이죠”라고 대답한다. 보통은 민주주의와 자유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고들 하는데 코스타리카 사람들 생각은 전혀 다르다. 폭력과 민주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앞서의 소녀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평범한 할아버지 역시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준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란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저들의 대통령을 보세요. 항상 많은 무장 경비원을 줄줄이 데리고 걷잖아요. 코스타리카 대통령은 아침 일찍 근처 공원을 혼자 조깅하거나 휴일에는 가족끼리 해변에 가요. 그것이 차이지요. 군대가 있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없어요.” 우리는 코스타리카식 민주주의를 배웠어야 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는 나라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군대가 없는 점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어떻게 군대를 용인할 수 있느냐는 투다. 무슨 복에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호기를 부리게 되었을까. 코스타리카 사람들에게 평화를 누리게 된 비결을 물으면 빈곤·고립·변방이란 단어를 우물우물 자주 입에 담는다.

코스타리카는 지금 원시의 자연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관광대국이 되었지만 유럽의 식민주의자들 눈에는 쓸모없는 땅으로 비쳤다. 구릉과 산맥이 발달하고 원시림이 우거져 대형 플랜테이션을 일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선주민의 저항이 끈질겨 스페인이 가장 오랫동안 식민지에 편입하지 못한 오지이기도 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나중에 군벌로 변모하는 대지주가 생겨나는 대신 소규모 농장만이 공동체와 같은 삶을 누리게 되었다. 스페인 군대와의 전쟁과 전염병으로 선주민이 거의 전멸해 값싼 노동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결국 독립심이 왕성한 작은 농장들이 국제 커피시장에 편입돼 살아가게 되었다.

변방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에 초라한 것과 빈곤이 버무려져 평화를 부르는 조화를 부리게 됐다고 이 사람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외부 투자자로서 글로벌 시장의 강자를 반기지 않는다. 그들이 들어오면 청소년 범죄나 마약, 알코올 의존증도 함께 따라오리라고 믿는다. 그 탓에 명색이 관광대국이면서도 코스타리카에는 ‘고만고만한’ 기업만이 들어와 있다. 크고 요란한 것에 현혹되지 않고 여백을 두는 게 코스타리카의 정신이다.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주변국에서 쫓겨나면서 얼결에 독립한 이 나라는 독립 영웅이나 장군 대신 종종 교사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일찍이 1869년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특히 여성까지를 포함한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1930년대 문자해득률은 남미 지역에서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당시 이미 시골 지역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정책을 펴 남미대륙에 만연하던 콜레라와 이질, 설사를 퇴치해 어린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토대를 만들었다. 1940년대에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했고, 군대를 폐지했다. 1961년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해 지금까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군대를 폐지한 과정은 극적이다. 1948년이 고비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은 근소한 차이로 야당에 승리를 거두었다. 부정선거 혐의가 짙었다. 여야가 대립하는 틈을 타 농장주였던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가 돌연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무너뜨렸다. 국민이 뽑은, 정통성을 가진 야당 지도자 오틸리오 올라테 블란코와 무력을 가진 피게레스가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희귀하게도 둘은 싸우지 않고 18개월간 피게레스가 집권한 뒤 나중에 올라테가 집권하기로 합의했다. 그 과정에서 피게레스가 ‘병영을 박물관으로 바꾸자’고 제안해 코스타리카에서 군대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테면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군대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피게레스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로부터 코스타리카는 자원을 군대 대신 교육과 복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가 전란에 휩싸이게 된 중요한 이유로 강대국 사이에 낀 지정학적 특수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코스타리카의 사정도 만만치는 않았다. 쿠바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서로 어느 편이냐고 묻는 험악한 상황도 이겨내야 했다. 파나마, 니카라과,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주변이 온통 내전에 시달리거나 군부가 통치하는 나라여서 언제 전쟁의 불똥이 튈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 코스타리카의 지도자들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자국을 평화를 상징하는 남미의 등대로 자리매김했다. 미국이 항상 내세우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그 어느 나라보다 잘 실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자국을 지지해달라고 양심적인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설득했다. 유엔 평화대학과 각종 시민단체를 유치해 선의의 안보력을 키웠다. 그 결과 이제 이 나라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오스카 아리아스 전 대통령의 입을 빌려 전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부유한 군사 계약자들은 전 세계에 첨단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약화한다. 국내의 납세자를 착취할 뿐만 아니라 해외의 독재자를 강하게 만들고 인간의 비참함을 더욱 악화시킨다.”

어디 이 나라라고 문제가 없겠는가. 빈부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선주민 보호 의식은 아직 희박한 편이다. 마약 밀매나 살인 같은 강력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조사에서도 이 나라의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즐겁게 산다는 점에서는 독보적으로 세계 1위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하루 중 세계에서 가장 자주 웃는다.

“국방 예산은 감축해야 하며, 교육받은 국민이 가장 뛰어난 무기”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은 만개한 민주주의다. 이 나라에서는 평범한 대학생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을 지지한 대통령에 대해 소를 제기해 승소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초등학생들이 놀이터를 밀고 주차장을 만들려는 교장을 상대로 소를 제기해 이기는 일도 일어난다. 청소년들은 자유롭게 자기가 좋아하는 정당의 행사에 참여해 즐긴다. 뜻만 있다면 정치 신인이라도 공탁금 한 푼 안 내고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는, 참여의 문턱이 정말 낮은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에서는 소수의 입을 막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치과 의사 얼굴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느냐가 곧 그 나라 복지 수준을 말한다고들 하는데 코스타리카에서는 의사 만나기가 정말 쉽다. 이 나라는 1990년대 중반, EBAIS라는 찾아가는 의료 시스템을 채택했다. 의사, 간호사, 기록 관리자, 그리고 몇 명의 기술자로 이루어진 팀이 각각 3500명 정도의 국민을 할당받아 밀착 관리하는 제도이다. 이들은 매일 10가구 이상을 방문해 진료 기록을 업데이트하고, 혈압을 재며 백신을 나눠주고 조언을 한다. 마을마다 고인 물에 지카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모기가 서식하지 않는지 감시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의사들은 맡은 환자의 병이 깊어지기 전에 감지하고 조처를 취한다. 이 체제를 통해 코스타리카는 심장병 사망률을 미국의 3분의 1로 줄일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군대를 포기하는 데서 비롯했다면 우리도 꿈꿔도 좋지 않겠는가. 모두가 코스타리카처럼 살기는 힘들겠지만 얼마 전에 방한했던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코스타리카 대통령 말마따나, 결국 “국방 예산은 감축해야 하며, 교육받은 국민이 가장 뛰어난 무기”라는 점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참고한 활자:〈군대를 버린 나라〉(검둥소), 〈내셔널 지오그래픽〉,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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