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 청년들이 쟁기를 가리키며 소곤댔다. 한복을 입은 일본인들은 ‘셀카봉’을 바라보며 웃었다. 몽골 여행객들은 “김치”를 외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물론 중국인이 가장 많았다. 지난 12월7일 국립민속박물관에는 각양각색의 모국어가 울려 퍼졌다. 아마 십수 년 뒤에는 보기 어려운 풍경일 것이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본관이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유력 후보지는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다.

1975년 문을 연 국립민속박물관은 여러모로 특별한 전시 시설이다. 여타 박물관들과 달리 철저히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춘 전시물로 채워져 있다. 국내 대규모 박물관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인 관람객 비율이 더 높은 곳이기도 하다. 다른 박물관들의 외국인 관람객 수가 전체 5%를 밑도는 반면, 국립민속박물관은 60% 이상이 외국인이다(2015년 기준). 박물관 위치가 외국인이 많이 찾는 경복궁 안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은 관람객 약 90%가 내국인이다. 메르스와 사드 문제가 생기기 전인 2014년에는 327만명이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았다.

ⓒ시사IN 윤무영12월7일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외국인들이 관광을 즐기고 있다.
왜 정부는 ‘잘나가는’ 국립민속박물관을 옮기려 할까? 문화재청이 주도하는 ‘경복궁 2차 복원 사업’과 맞물려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선 곳은 원래 경복궁 선원전(역대 조선 왕들의 어진을 모신 곳)이 있던 터다. 2000년께부터 정부는 선원전을 복원하기 위해 국립민속박물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혀왔다. 큰 변수가 없다면 2031년부터 국립민속박물관이 ‘경복궁 프리미엄’을 잃는 것은 기정사실에 가깝다.

논란의 핵은 이전 후보지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의 취임 직후인 지난 7월부터 세종시가 유력 후보로 급부상했다. 2023년 완공되는 세종 국립박물관단지에 포함된다는 구체적 내용이 보도됐다. 지역 언론은 물론 중앙 언론들도 세종시 이전을 점쳤다. 문제는 오래된 다른 후보가 있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유력 이전지로 검토됐던 곳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용산이다.
그 뒤 수차례 용역·연구를 거치며 국립중앙박물관 옆 문체부 부지에 국립민속박물관을 더한다는 계획이 섰다. 계획의 일환으로, 지난해 12월 국립민속 박물관 측은 경기도 파주에 23억원짜리 개방형 수장고(박물관 유물을 보관하는 창고) 설계용역 계약을 맺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연 ‘용산이 아닌 세종이 유력한 국립민속박물관 후보지’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계 원로들은 즉각 들고일어났다. 지난 10월18일 역대 박물관장들을 비롯한 원로들은 ‘국립민속박물관 세종시 이전 반대 포럼’을 여는 한편, 청와대 청원도 감행했다. 2003년부터 3년간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지낸 김홍남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세계 각국 박물관학계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김 교수는 “뉴욕 자연사박물관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관계자, 하버드 대학교와 런던 대학교 교수들 역시 국립민속박물관 세종시 이전에 부정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10월18일 역대 박물관장을 비롯한 문화계 원로들이 ‘국립민속박물관 세종시 이전 반대 포럼’을 열었다.
공식 발표 없이도 세종시가 유력한 까닭

문체부의 공식 입장은 “확정된 바 없다”이다. 지난 11월10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에서 관련 질문을 받은 도종환 장관은 “국립민속박물관 세종시 이전은 결정된 사안이 아니다. 10년 이상 걸리는 사업이기에 폭넓게 검토하겠다”라고 답했다. 실무자의 이야기는 조금 모호하다. 문체부 관계자는 “이 건은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로 선정되었기에 실천 방안을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종시에 추진 중인 국립박물관단지를 국립민속박물관 확대 이전 등을 통해 국가 상징 문화 공간으로 조성’이 그 내용이다.

이전 당사자인 국립민속박물관도 움직였다. 지난 7월 초순까지만 하더라도 국립민속박물관은 기존 안대로 용산 이전을 준비해왔다. 〈시사IN〉이 입수한 ‘2017. 7. 10. 국립민속박물관 주요업무계획’ 문서에는 “2030년까지 용산가족공원에 본관을 이전 건립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도종환 장관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국립민속박물관은 계획을 완전히 바꿨다. 지난 8월3일과 8월18일, 박물관 측은 ‘국립민속박물관 세종시 이전 관련 협조 및 내국인 관람객 증대방안 작성 요청’, ‘세종시 이전 계획에 따른 2017년도 주요 시설공사 추진계획 보고’라는 내부 문건을 작성했다. 공식 발표 없이도 세종시가 박물관 유력 이전지로 꼽히는 까닭이다.

석연치 않은 정황을 두고 일각에서는 의혹을 제기한다. 도종환 장관의 숙원 사업으로 알려진 국립한국문학관을 서울에 세우기 위해 국립민속박물관을 세종에 보낸다는 것이다. 도 장관은 국회의원이던 2015년,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을 규정한 문학진흥법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실제로 도종환 장관 취임 이후 문체부는 국립민속박물관이 들어서려던 용산 부지에 국립한국문학관을 신축하려고 시도했다.

더 단순한 설명도 있다. 여러 이유에서 세종행은 용산행에 비해 ‘편한 선택’이다. 지금 시점에 용산 이전안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권이나 문체부, 세종시가 아닌 서울특별시다. 서울시는 국립민속 박물관이든 국립한국문학관이든 용산공원 내 건립을 반대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국립민속박물관 이전에 반대해온 것은 지난해 중순부터다. 공원 계획과 연계가 없는 정부 부처의 ‘땅 나눠먹기’는 문제가 많다”라고 말했다.

반면 세종은 제약이 없다시피 하다. 넓은 땅이 확보되어 있고 행복도시법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 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예산 지원도 넉넉하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부담에서도 자유롭다. 전국 지자체를 상대로 부지를 공모하는 방안에 비해, 세종 국립박물관단지 계획의 패키지가 되는 방식은 최종 판단자의 부담을 확연히 덜어준다. 행정편의주의적 ‘대안’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종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사실상 하나밖에 없다. 대한민국 대표 박물관의 마비 가능성이다. 김홍남 교수는 “박물관은 컬렉션인 동시에 연구 시설이다. 관람객이 충분히 들지 않거나 학문적 인프라가 부족하면 몰락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종시에 간다면 둘 다 해당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86년부터 8년간 국립민속박물관 관장을 지낸 이종철 전 관장이 주도한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11월 한 달간 614명이 참여했다. ‘문화’보다 ‘행정’에 방점이 찍힌 문화행정을 뒤엎기에 퍽 부족한 숫자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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