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부키 펴냄

지난해 여름 ‘이자벨 위페르 특별전’에서 영화 〈레이스 짜는 여인〉(1976·클로드 고레타 감독)을 봤다. 연인에게 버림받고 영혼이 다 빠져나간 눈으로 카메라(관객)를 보는 뽐므(이자벨 위페르)의 마지막 표정을 잊지 못한다(자크 오몽이 그의 책 〈영화 속의 얼굴〉(1992)에서 이 영화를 다루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대개의 남자에게는 여자에 대한 어떤 근원적 죄의식 같은 것이 있다(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은 바로 그 죄의식을 처연하게 소환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생각하면 고(故) 오규원 선생의 시 ‘한 잎의 여자’도 생각난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눈물이고 슬픔이고 병신인 여자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녀를 사랑한 남자 역시 어쩐지 눈물이고 슬픔이고 병신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영화도 그랬다. 그녀의 압도적인 얼굴 앞에서 나는 눈물이고 슬픔이고 병신이었다. 원작 소설이 20여 년 만에 재출간됐다. 영화와 제목이 다르다. 〈레이스 뜨는 여자〉(부키, 2008).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없는 ‘레이스 뜨는 여자’가 가능할까 싶었으나 기우였다.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파스칼 레네의 분석적이고 매혹적인 문장들이다. 뽐므와 그녀의 어머니를 독자에게 소개하는 도입부는 장편소설에서 ‘보여주기’가 아니라 ‘말하기’의 방식으로 인물들의 육체를 빚어나간 사례의 모범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운명이 인색하게 나눠주는 기쁨과 환멸을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였다”(13쪽)나, “현실을 숨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내는 바람에 눈길이 거기에 와서 멈추기를 깜박 잊어버릴 만큼의 순진성을 남달리 타고난 사람들이었다”(14쪽)와 같은 문장들과 함께 이야기는 우아하게 흘러간다. 

남녀 간 사랑에 대한 계급·문화적 성찰

그런 뽐므가 허영심 많고 현학적이지만 그녀의 영혼에 매혹되고 마는 순수한 청년 에므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그들이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처음 함께 걷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맺은 날도 마찬가지였다. 각 단계마다 그는 달리 어떻게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회한을, 하지만 금세 잊히고 마는 회한을 느끼며 각 단계를 넘어서곤 했다.”(122쪽)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에므리는 뽐므의 “견디기 어려운 순진성”(116쪽)에 숨이 막혀 그녀와 결별한다. 이런 이야기는 왜 이리 쓸쓸한가. 

영화 〈레이스 짜는 여인〉의 원작 소설은 〈레이스 뜨는 여자〉이다.

사랑이 시작된 이유와 사랑이 끝난 이유가 같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 동안 뽐므는 시종일관 뽐므였을 뿐인데 그녀는 선택되었고 또 버려졌다. 그러나 에므리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나면 존재, 만남, 소통, 파국 따위 단어가 어지럽게 떠올라 뒤엉키다가 이윽고 자포자기의 슬픔으로 가라앉는다. 작가 자신이 ‘68 세대’인 까닭도 있겠지만 이 소설에는 남녀의 사랑에서 계급적·문화적 차이가 갖는 의미에 대한 섬세한 성찰이 있다(영화에서는 이 점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굳이 그 점을 강조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는 그래도 될 만한 보편성이 있다.  

조리 정연한 서사는 따분할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믿었던 ‘누보로망’의 세례를 받은 작가의 작품답게 이야기는 고분고분 흘러가지 않는다. 서술자는 불쑥 글 속에 나서서 인물들이 가공의 창조물임을 괜히 강조하기도 하고 가끔씩 이야기의 흐름과 무관한 곳으로 가서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의도는 명백하다. 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하는 정서적 독서 말고 상황의 사회심리학적 의미를 곱씹는 성찰적 독서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밀란 쿤데라 식으로 말하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아는 명석한 소설이다. 그러니 이미 영화를 본 사람에게도 이 소설은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이 소설은 지금도 프랑스에서 해마다 2만 부씩 팔린다.

기자명 신형철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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