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항쟁(이하 6월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영화로 제작되어 관객을 만난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던 박종철 사건을 다룬 영화 〈1987〉 제작에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함께했다. 그 가운데 박종철씨의 아버지 박정기씨와 형 종부씨를 빼놓을 수 없다. 사건 당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시위 학생들의 플래카드에 그대로 담겼다. 박정기씨는 이후 30여 년 동안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다 최근 노환이 악화돼 요양 중이다. 아버지에 이어 형 종부씨가 박종철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유가협 청년부장을 거쳐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로 있는 박종부씨를 서울 남영동 근처에서 만났다.


ⓒ시사IN 조남진고 박종철씨의 형인 박종부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는 “문재인 정부의 사법 개혁이 성공해 다시는 동생이 겪은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개봉하는데.

동생이 고문 끝에 숨진 1987년 1월14일부터 6월항쟁의 분수령인 6월10일까지 사건 흐름을 담은 영화다. 작년 11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검토 요청이 들어와 협조했다. 전두환 정권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했지만 최환 검사, 이부영 선생, 한병용 교도관 등 용기 있는 이들의 활약 덕분에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과정을 그렸다.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지루한 부분이 거의 없더라. 실제 상황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니까.

촬영장에도 가보았나?

유족인 저랑 제 여동생이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에 출연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종철이 묘에 가서 참배하고 같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촬영 장소, 소품 제작 등 세부적 사항에 대해 필요한 요청이 오면 협조했다.

30년이 흘러 잘 모르는 세대를 위해 동생 사건을 간략히 설명한다면?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경찰의 거짓말로 시작된 사건이다. 서울대생을 고문해 죽인 후에 사건을 축소·은폐하고 조작했다.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민들의 분노로 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내게 한 사건이다. 영화 〈1987〉이 모든 과정을 세세히 담고 있다.

올해가 박종철 열사 30주기인데 유족은 어떻게 보냈나?

지난 30년 동안 늘 지내왔던 추모제이고 늘 같이했던 6월항쟁 기념식이지만 올해 특별히 감회가 달랐다. 올해 1월14일 동생 30주기 추모제를 부산 촛불집회 현장에서 치렀다. 또 한 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치른 추모제였다. 아흔이 된 아버지께서도 촛불 들고 참석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거뜬히 참석하셨는데 2월에 요추 골절상을 입으셨다. 그날 이후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

박종철 추모곡이 새로 나왔는데?

〈타인의 고통〉이라는 노래다. ‘그대 멀리 간 길을 따라가다 길을 놓치고 말았네/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니고 길이 길을 만드네’ 듣고 있으면 종철이 진심이 느껴지곤 한다. 몇 번 인사도 나눴지만 이 자리를 빌려 추모곡 만든 모든 분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박종철을 어떤 동생으로 기억하나?

종철이가 집에서는 막내로 귀염을 많이 받고 자랐다. 한편으로 매우 의젓하고 어른스러웠다. 나와 일곱 살 차이 나는데 내가 첫 대학 입시에 떨어져 실의에 잠겨 있을 때 초등학교 졸업반이던 종철이가 자전거를 하나 사왔다. 6년 동안 저금했던 저금통을 털어서 자기 덩치보다 훨씬 큰 자전거를 내밀며 “형님아 니가 먼저 타라. 내는 조금 더 크면 타면 된다” 그러더라. 중학교, 고등학생 시절에도 어느 그룹에 속하든 리더 노릇을 했다. 놀기도 잘하고. 사실 우리 집에 그런 사람이 없었다.

ⓒ미디어오늘2007년 이한열 열사 20주기 추모제에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왼쪽)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운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나란히 참석했다.
생전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때는?

비보를 듣기 한 달 전인 1986년 12월 중순이었다. 당시 어머니가 마침 부산에서 상경해 종철이와 내 약혼녀랑 넷이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때 종철이가 청계피복노조 지원 시위에 가담해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였다.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니까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앞으로 노동운동 현장과 약간 거리를 두고 공부에 열중하겠다. 방학 때 학교에서 하는 일본어 특강을 신청하겠다.’ 겨울방학을 맞아 부산에 내려갔다가, 아마 1월12일인가 특강 개설 시점에 맞춰 상경했다. 그게 스물두 살 꽃다운 동생의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이틀 후 남영동에 끌려가 변을 당했으니까.

동생 사건 이후 가족들 삶이 달라졌을 텐데.

종철이가 죽은 뒤 모든 게 바뀌었다. 가족의 모든 희망이 무너졌다. 매일이 악몽이었다. 내가 이럴진대 어머니 아버지는 오죽하시겠나. 사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형제로서는 짐작도 못한다. 동생이 살아 있다면 올해 52세이다. 아마 촛불도 같이 들었겠지. 촛불집회 끝나고 저하고 술도 한잔 같이 했을 거고. 살아 있었다면 교사를 했을 거 같다.

전두환 정권이 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많이 괴롭혔다던데.

동생 그렇게 되고 나서 경찰이 사실대로 알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서울로 가자고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사망 소식을 알려줘 어머니는 까무러치시고. 당시 대공분실 요원 한 명이 아버지를 따라다니고, 한 명은 나를 미행했다. 특히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고초가 심했다. 아버지는 사건 몇 달 뒤인 6월30일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정권이 아버지를 무던히 괴롭혔다는 것을 나중에 아버지한테 들어서 알게 됐다. 아버지는 온갖 회유와 협박을 이겨내고 정년퇴직 뒤 유가협 활동으로 동생이 못다 한 일을 하셨다.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를 어떻게 보나?

당시 검찰 수사는 1월21일부터 시작해 4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국민의 압력과 여론에 떠밀려서 진행한 수사였다. 경찰이 감춘 걸 검찰이 밝혀냈다고 자랑하지만 사실 검찰도 진상을 축소·은폐·조작했다. 이른바 관계기관 대책회의라는 ‘윗선 지시’로 덮어두다가 양심세력의 폭로가 나오면 마지못해 수사에 나섰고 꼬리자르기 식으로 끝냈다.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고 노무현 대통령(영정 든 사람).
2015년 검찰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 기록을 공개해달라고 요구했는데?

고문치사 혐의 경찰관 5명(조한경·강진규·황정웅·반금곤·이정호)과 사실을 은폐 조작한 혐의가 있는 간부 3명(박처원·유정방·박원택), 그리고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에 대한 수사 및 재판 기록 공개를 요청했다. 검찰이 거부했다. ‘기록물 공개로 사건 관계자의 명예나 사생활 비밀 또는 생명 신체에 위해가 생길 수 있고 국가의 안전보장, 풍속,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어이가 없었다.

검찰이 지금까지도 공개를 거부하는 진짜 이유가 뭐라고 보나?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한 검찰 수사의 실체가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검찰이 스스로 개혁한다고 하지만 어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과거 적폐 청산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대표적인 적폐가 30년 전 박종철 사건에서 검찰이 보여준 행태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 그 과거로 인해서 돌이켜보면 그 이후에도 고문이 계속되었다는 게 드러나고 있지 않나. 검찰이 개혁 의지가 있다면 유족에게 지금이라도 수사 기록을 공개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 차원에서 유족에게 공식 사과한 적이 있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이렇게 나와 있다. ‘부실 수사한 검찰 수사, 특히 관계기관 대책회의라는 외압에 굴복해서 수사권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함으로 인해 유족에게 고통을 안긴 책임이 있다’며 유족에게 사과하라고 정부와 검찰에 권고한 바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다.

2015년 박종철 사건 수사 검사였던 박상옥 후보자가 대법관으로 지명돼 현재까지 활동 중인데?

박근혜 정권의 한계였다. 인사 청문회 때 검찰이 어떻게 부실하게 수사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정도로 위안 삼아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검찰이 네 차례에 걸쳐 수사했지만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덮었던 책임자들의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기록을 공개해달라고 했는데 검찰이 끝까지 공개를 거부했다.

동생이 고문치사를 당하면서도 보호하려 했던 선배 박종운씨가 과거 한나라당 공천을 받았는데?

사건 뒤 종운이네 가족이랑 서로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다. 많이 변해 실망스럽다. 매년 1월14일 열리는 동생 추모제에 오는데 선후배들에게 멱살 잡혀 쫓겨나는 등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곤 한다. 그 정도로 갈음하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아버지와 인연이 깊은데?

동생 죽고 사흘 뒤 그때 변호사였던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집으로 찾아와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위로하고 가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동생 추모집회를 주도했다가 연행되어 구속영장까지 청구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아버님이 충격을 많이 받으셨다. 서거 당시 상주 노릇을 하던 문 대통령과 많이 슬퍼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문 대통령은 예전부터 유가협 어르신들을 많이 챙기시는 편이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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