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둘째 날이었다. 첫째 날은 일을 배우는 걸로 끝났고, 사실상 첫 출근 날이었다. DVD방 사장이 야간에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가게를 보는 간단한 일. 돈도 벌고 영화도 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다. 손님 한 팀이 방으로 들어가고, 옆자리에 앉은 사장은 콜을 기다리며 대리운전 PDA 단말기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 뒤 손님이 나간 방을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손도 못 대고 나왔다. ‘사랑’의 흔적이 그렇게 더러울 일인가. 돈은 안 받아도 되니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관상 좀 볼 줄 아는데, 너는 이런 일을 할 관상이 아니다.”

DVD방 아르바이트할 관상은 따로 있는 걸까. 웃기고 슬프다고 생각했다. 강렬했던 이틀의 경험은 몇 년 뒤 이용승 감독(37)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 〈7호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때 그 ‘사장님’도 〈7호실〉을 보셨을까? “지금은 뭐 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워낙 영화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 보긴 할 거 같다. 굉장히 깊숙이 감정이입하면서. 근데 영화관에서 볼 거 같지는 않고 P2P 서비스로 받아보시지 않을까(웃음).”

ⓒ시사IN 이명익이용승 감독은 상업영화 데뷔작인 〈7호실〉에서 한국 사회 ‘을들의 분투’를 다루었다.
〈7호실〉(제작 명필름,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은 이용승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지난 7월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 먼저 관객을 만났다. 온라인 예매 시작 30초 만에 3000석을 매진시키며 하반기 기대작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후반 작업을 마치고 11월15일 개봉해 11월24일 현재까지 관객 32만명을 만났다. 기대에 비하면 신통치 않은 점수다. 배급 환경 자체가 좋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7호실〉을 비롯해 11월에만 개봉 영화가 59편에 달한다. 12월 극장 성수기를 피해 독립영화·저예산 영화 등이 대거 개봉했고, 여기에 흥행과 작품성이 이미 입증된 재개봉 영화도 7편이나 가세했다.

〈7호실〉은 이렇게 ‘쉽게’ 극장에서 보내기는 아쉬운 영화다. 멸종된 줄 알았던 한국 블랙코미디 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자, 이제껏 한국 영화가 만난 적 없는 혼종 장르 영화다. 공포·스릴러· 코미디가 한데 뒤섞여 100분 동안 쫀쫀하고 매끈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이 감독 역시 “지금껏 없던 영화를 해보겠다는 도전이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조선족 캐릭터를 다루는 풍부한 결

영화는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몰락한 상권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을들의 분투’를 다룬다. 한국은 ‘사장님의 나라’다.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가 26.8%로 넷 중 한 명꼴이고 이 가운데 55%가 창업 1년 안에 폐업한다. 5명 중 한 명은 월평균 100만원 이하를 번다 (통계청, 2016). 할리우드 DVD방 사장인 두식(신하균)은 그런 사장 중 한 명이다. 아르바이트생 태정(도경수)에게 두식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다. 당장 핸드폰이 끊길지도 모르는데 밀린 아르바이트비 200만원은 감감무소식이다. 학자금 대출로 이미 어깨에 얹고 있는 빚이 1800만원이다. 그런 두 사람이 DVD방 7호실에 각자의 비밀을 감춘다. 두식은 7호실의 문을 잠가야 살 수 있고, 태정은 7호실의 문을 열어야 살 수 있다. 이런 기본 플롯 위에 부동산 문제와 자영업자의 몰락과 빚더미 위의 청년, 이주노동자 문제 등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문제를 집요하면서 재치 있게 엮는다.

〈7호실〉에서 신하균(오른쪽)과 도경수는 감독이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역량을 발휘했다. 어떤 장면과 대사가 애드리브였을지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DVD방의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인 조선족 한욱(김동영)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용승 감독의 미덕이 발휘된다. 물론 한욱은 이 영화의 희생자이지만, 그 역할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한욱의 시체는 클로즈업되어 전시되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 영화가 조선족을 다뤄왔던 폭력적인 방식을 떠올려보면 〈7호실〉 안에서 공들여 보여주는 한욱 캐릭터의 풍부한 결은 분명한 발전이다.

DVD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주 무대로 하는 데다, 컷 없이 배우를 자유롭게 놔두는 이용승 감독 특유의 연출 스타일은 영화를 연극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같은 장치가 거의 없다. 관객이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는 대사를 통해 일정 부분 해소되는데 그 방식 역시 촌스럽지 않다. 〈7호실〉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두식과 태정의 싸움 장면도 마찬가지다. 동선만 잡아주고 몸 가는 대로 싸우도록 지시했다. 영화에서 기대할 법한 매끈한 싸움 장면 대신 생수통과 섬유탈취제와 화분과 DVD가 날아다니는 사실적인 싸움을 볼 수 있다.

DVD방을 찾아오는 손님, 매물 보러 온 사람, 형사 등 몇몇 등장인물의 톤이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와 다르게 튀는 건 감독의 의도였다. 이를테면 ‘가장 〈7호실〉스러운’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욱의 사고 이후 두식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잔상처럼 보여준다고 해야 하나. 황당하고 기괴한 인물을 배치하면서 장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호오가 많이 갈리더라. 저는 만족스러운데…. 이건 제가 안고 가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두 주연배우 신하균과 도경수는 감독이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역량을 발휘했다. 어떤 장면과 대사가 애드리브였을지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힌트를 드리자면, 심지어 차를 세우는 엔딩도 신하균 선배 애드리브였어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생생하고.”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해석해왔고,
감독은 그 의견을 대폭 수용했다. 태정이 살 법한 집 역시 도경수의 의견에 따라 섭외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25만원짜리 고시원에 사는 게 아니라 3~4명이 25만원씩 모아서 100만원 정도의 월셋집에 살지 않을까, 하더라고요. 태정 역은 도경수씨가 캐스팅되면서 설정이 디테일해졌어요. 다큐멘터리 같은 배우죠.”

영화에 다 담지 못한 아까운 장면도 있다. 이 감독은 태정이 시체가 든 캐리어를 들고 가는 장면을 8분 넘게 컷하지 않고 찍었다. 영화 속에서는 몇 초 만에 지나가는 장면이다. 캐리어는 실제 무게감을 내기 위해 촬영부 그립팀의 장비를 집어넣은 채였다. “진짜 같았다고 해야 하나. 도경수의 얼굴이 아니라 태정의 얼굴이 나오는데,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해줄 줄은 몰랐어요, 경수씨가. 마지막까지 이 장면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정도로 아깝더라고요.”

〈7호실〉은 언뜻 열린 결말처럼 보인다. 한욱의 시체를 ‘대포차’에 태우고 떠나는 두식은 어떻게 살게 될까. 몇 번이나 쓰고 고치고 다시 썼던 지금의 결말을 이 감독은 만족할까.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섬뜩할 정도로 닫힌 결말인데. 시체가 자신의 옆에 있을 때 가장 안심이 되는 삶이, 끔찍하지 않을까. 경찰서를 가든 안 가든 중요하지 않다. 절망과 한 몸으로 살아야 하니까.”

재미와 의미를 거머쥔 영화

첫 상업영화를 내놓은 감독은 ‘좋다’는 반응보다 ‘나쁘다’는 반응을 더 크게 몸으로 느낀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생각한다. 중학생 시절 대학생 친척 누나가 선물로 줬던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처음 대학에 입학했던 1999년 그때, 보름 만에 자퇴하면서 아예 영화계를 떠났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중앙대 졸업 작품인 〈런던 유학생 리처드〉(2010)와 단국대 대학원 졸업 작품인 〈10분〉(2014)으로 국내외 각종 영화제 신인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며 ‘상금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용승 감독이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한국 영화 관객들은 〈7호실〉이라는 새로운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재미와 의미는 병립할 수 없는 가치처럼 여겨지곤 했다. 반면 〈7호실〉은 두 가지를 모두 거머쥔다. 영화가 현실과 시대를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잘 만든 극영화는 다큐멘터리보다 더 지독하게 현실을 파헤친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