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이 있다. 극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을 찾아왔는데 자궁파열이 의심되는 40대 기혼 여성이다. 문진을 하는데 자꾸 시선을 피하고 대답을 얼버무린다. 알고 보니 임신 16주에 임신중절수술을 받은 후 출혈이 심해지자 수술한 병원에서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수술 전 작성한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라는 각서 때문에 의료진 동행도 없이, 남편도 없이 혼자 택시를 타고 병원에 왔다. 이 시기에는 수술보다 유도분만이 안전하나, 1박2일이 걸리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고 입원 가능한 병원도 드물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출혈량 등을 알기 위해 해당 의료진과 통화하려 했지만, 여성은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응급수술과 수혈로 위급한 상황은 넘겼고, 여성은 병원비 때문인지 아이들 때문인지 3일 만에 서둘러 퇴원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이 여성은 혼자였다.

또 한 여성이 있다. 학원 강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16세 여고생. 두렵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신고를 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다. 평소에도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기에 스트레스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가 뒤늦게 임신 테스트를 해보고 나서야 성폭력상담소에 연락했다. 처음 초음파 검사를 한 산부인과는 ‘성폭력 피해자 전담 의료기관’이 아니라면서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두 번째 병원에서는 성폭력 피해 사실이 법원에서 입증되어야 합법적으로 수술해줄 수 있고, 아니면 기록을 남기지 않는 대신 수술비로 150만원을 내라고 했다. 그다음으로 아동청소년 성폭력 전담 의료기관인 ‘해바라기센터’를 방문했지만 부모 동의가 있어야 된다고 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이기도 했던 이 여성은 결국 부모에게 말하기를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병원에 왔을 때는 임신 18주가 넘은 상태였다.

ⓒ정켈 그림

여기 또 한 여성이 있다. 항전간제(경련 발작을 억제하는 약으로 피임약의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음)를 복용 중인 뇌전증 환자라 콘돔으로만 피임을 했는데, 임신이 되었다. 이 여성과 남자친구 모두 대학생이었고, 낳지 못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 과정에서 남자친구가 행한 폭언과 폭력은 이 여성을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갔다. 여성은 건강에 위험이 있으면 합법적인 낙태가 가능하다는 정보를 듣고, 복용 중인 항전간제를 일부러 끊었다. 경련 발작, 응급처치와 이후 치료 과정에서 자연유산이 되었고, 나중에 깨어난 여성은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임신이 종결되었다는 사실에 더 복잡한 눈물을 흘렸다.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나중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 양육비를 요구하는 거 아니냐’며 여성의 보호자를 사칭해 병동과 원무과에 수시로 전화해서 개인정보를 알아내려 했다. 퇴원 후 여성은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낙태죄로 고발하겠다”라는 협박을 받았다면서 진단서를 떼러 왔다(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위 내용의 일부는 각색했다). 

임신중절에 대한 권리는 건강권과 인권

한 해 17만 건 이상 임신중절이 일어난다고 한다. 엄청난 고민, 안타까움, 그리고 건강에 대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무엇이 가장 맞는 일인지 확신을 가지고 판단한 여성들이 매년 17만명 넘게 수술대에 오른다. 흔히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이 대립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런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삶의 스펙트럼이 있다. 안정적인 양육과 안전한 임신중절이 모두 보장된 사회, 파트너의 유무와 관계없이 출산과 임신중절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회에서라면 임신중절이 진짜 선택일 것이다. 지금은 임신중절이 선택지 중의 하나가 아니라 마지막 비상구이다. 비상구까지 내몰리는 상황도 줄어야 하겠지만, 비상구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통과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낙태죄 폐지’ 요구의 근거가 건강권과 인권인 이유다.

기자명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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