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과 크룹스카야는 1894년 페테르부르크의 마르크스주의자 회합에서 처음 만나 동지에서 연인이 되었다. 두 사람은 1897년 무렵 반체제 사범으로 나란히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898년 7월 유형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24년 레닌이 쉰네 살의 나이로 먼저 타계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다. 하지만 레닌은 아내와 함께 망명 중이던 1910년, 파리에서 이네사 아르망이라는 러시아 유부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아르망이 레닌의 아이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여섯 번째 아이를 낳고 죽기까지 무려 11년 동안 공개적인 내연 관계를 맺었다.

아르망은 열여덟 살 때 모스크바의 기업가 아들과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체르니솁스키의 장편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 뛰어들었다가 유형을 선고받은 그녀는 유형지를 탈출한 망명자였다. 마흔 살의 레닌은 아르망을 이웃집에 살게 했고, 아내와 스위스로 거처를 옮길 때도 그녀를 데리고 갔다. 바바라 포스터, 마이클 포스터, 레다 해더디가 함께 쓴 〈욕조 속의 세 사람〉 (세종서적, 1998)에는 레닌의 전기를 쓴 로버트 페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새로운 사랑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진정으로 이네사를 좋아했다.”

헤르만 베버가 쓴 전기 〈레닌〉 (한길사, 1999)에 따르면 “레닌은 체르니솁스키를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렀다”라고 할 만큼, 10대 중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수없이 되풀이해서 읽었다고 한다. 그 책이 레닌에게 끼친 중요성은 1902년 출간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서한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똑같은 제목을 붙인 것으로 능히 입증된다. 체르니솁스키 소설의 어떤 요소가 레닌 사상의 핵심이 되고 그를 혁명으로 이끌었는지 세세하게 살피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다만 그 소설이 레닌 부부와 아르망의 사랑과 결혼에 끼쳤을 영향만 언급하고자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열린책들, 1991)의 여주인공 파블로브나는 집안에서 결혼을 강요하는 부잣집 외동아들과의 약혼을 깨트리고, 가난한 의학도인 로푸호프를 선택한다. 새로운 인류가 되겠다는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결혼 생활부터 개조하기로 하고 세 가지 서약을 한다. 첫째, 사랑할 때 이외에는 각방을 쓴다. 둘째, 서로의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셋째,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는다. 로푸호프는 기초의학에 헌신하기 위해 박봉의 의대 교수가 되고, 파블로브나는 여공들을 모아 조합제로 운영하는 봉제공장을 차린다. 그들의 결혼 생활에는 그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결혼 4년째, 파블로브나는 남편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키르사노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 자신도 그를 연모하게 된다. 키르사노프에 대한 애정을 억압하느라 신경증 환자가 된 그녀는 어느 날 미친 듯이 자신의 심정을 남편에게 고백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가 봐요.” 그러자 로푸호프는 이렇게 아내를 다독인다. “당신에게 최선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나에게도 역시 기쁨을 주지. 그것이 당신에게 하등의 불행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게 나한테 무슨 불행을 가져오겠어?”

고백 직후 파블로브나는 미안한 마음에 남편에게 “오직 당신만을. 당신 이외엔 어느 누구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다짐하지만, 로푸호프는 ‘그것이 그녀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로푸호프는 자살을 위장하여 종적을 감추고 남은 두 사람은 결혼을 한다. 앞서 세 가지 서약은 이번 결혼 생활에서도 유지된다. 그렇게 6년째, 죽은 줄 알았던 로푸호프가 비몬트라는 이름의 미국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고 파블로브나의 친구인 카테리나와 결혼한다. 이후 두 부부는 하나의 공동주택에서 사이좋게 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할 필요가 있을까?

‘동료애로 맺어지는 결혼’이라는 이 소설의 주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어로 번역된 후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 흔적을 남겼다. 이뿐 아니라 마야콥스키와 파스테르나크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실생활에 강력한 모범이 되었다. 체르니솁스키가 시도했던 ‘대안적 결혼’의 의미를 독일 문학평론가 한넬로레 슐라퍼는 〈지성인의 결혼〉 (중앙북스, 2012)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사랑은 더 이상 지속적인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선택을 위한 재배치이다.”

파블로브나의 경우처럼 한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점과 배타적 소유에 기반을 둔 전통적 결혼 규범은 교집합을 허용하지 않는 한편, 유동하는 사랑에 대해 사회적 질시(疾視)나 법적 제재 이상의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체르니솁스키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류는 이렇게 반문한다. ‘움직이는 사랑을 포용할 수만 있다면 굳이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아닌 실존주의에 근거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심기용·정윤아 지음
알렙 펴냄
심기용·정윤아의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알렙, 2017)는 폴리아모리 (polyamory)에 관한 국내 최초의 소개서다. 폴리아모리는 여럿을 뜻하는 그리스어 접두사 폴리(Poly)와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명사 아모르(Amor)의 변형태인 아모리(Amory)를 합성한 단어다. ‘비독점 다자 연애’로 번역되는 이 역어에서 ‘다자 연애’에 방점을 찍은 사람들은 A가 B, C, D…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 폴리아모리라고 말한다. 반면 ‘비독점’에 방점을 찍게 되면 A한테는 B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폴리아모리스트가 될 수 있다. 즉 A는 B밖에 없고 앞으로도 계속 B만 사랑할 테지만, B가 다른 이성과 사랑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다면 그는 훌륭한 폴리아모리스트다. A가 그러는 이유는 B의 기쁨이 진정 나(A)의 행복을 배가시켜주기 때문이다. 로푸호프가 그랬다. 폴리아모리는 자기 합리화로 위장된 문란한 엽색 행각이 아니라, 소유욕과 일체화된 사랑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런 훈련은 결코 폴리아모리를 표방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미덕이 아니다. 심기용·정윤아는 이 책 말미에 폴리아모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책 스물한 권을 소개하고 있는데 실상과 거리가 먼 목록이다. 비독점적 다자 연애의 세계를 너무 낙관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책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헤이젤 로울리의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천국에서 지옥까지〉(해냄, 2006)와 미셸 우엘베크의 〈소립자〉(열린책들, 2009)를 추천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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