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우연하게 발견되는 것 같아요. 무조건 한 가지 목표를 좇기보다 방황하는 과정에서 꿈을 찾을 수 있었어요.” 유튜브 크리에이터 도티(본명 나희선)씨의 말에 청소년 130여 명은 눈과 귀를 모았다. 지난 11월7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2017 직업을 창조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사IN〉 드림 콘서트’가 열렸다. 드림 콘서트는 〈시사IN〉이 사회 환원 차원에서 주최하는 진로 교육 프로그램이다. 6회째인 이번 행사에서는 새로이 일일 인턴십 프로그램을 접목했다.

특별 게스트로 나선 도티씨는 유튜브 게임 채널 크리에이터이자 ‘샌드박스 네트워크’ 공동창업자다. 그의 게임 방송은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2013년 첫 방송을 시작한 그의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193만명에 이른다. 영상 누적 조회수 역시 대한민국 게임 채널 가운데 가장 높다.

ⓒ시사IN 조남진유튜브 크리에이터이자 샌드박스 네트워크 공동창업자 도티씨는 특별 게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학창 시절 도티씨의 목표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중·고등학교 때는 방송 작가를 지망했고, 시인도 되고 싶었다. 전국 단위 글쓰기 대회에서 1등상을 타 입상 실적으로 연세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국문학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2학년 때 법학으로 전과를 결심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잘 풀리지 않았다. PC방을 전전하며 방황하다 군대에 갔다. 전환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찾아왔다. 군대 생활관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화를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에 마음을 빼앗겨 방송사 PD를 새롭게 꿈꾸게 됐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방송사 입사를 준비했다. 유튜브라는 새로운 세상은 이 시기에 수강한 저널리즘 수업에서 접했다. 자기소개서에 쓸 특별한 한 줄을 만들자는 의도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애초 목표했던 구독자 1000명이 금세 1만명이 되고, 10만명이 됐다.

계기는 우연이었지만 운만 바라봤던 것은 아니다. 구글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여러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노하우를 배웠다. 그 친구와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해외 디지털 미디어 시장의 변천을 둘러보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친구와 함께 차리기로 결심한 회사가 샌드박스 네트워크다. 학창 시절부터 꾸준히 익혀온 취미도 힘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가수 이효리씨를 좋아해 그녀의 영상을 모조리 모았다. 대학 때는 피겨 스타 김연아 선수의 연기 영상을 수집했다. 이를 팬카페에 올리기 위해 독학으로 영상편집 기술을 공부했다. 이때 경험이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길을 선택하는 데에 힘을 실어줬다. 그의 좌우명은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이다. 누군가는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취미도 훗날 큰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무대를 내려오기 전 그의 끝인사는 “꿈이 발견되길 바랍니다”였다.

특별 게스트에 이어 연단에 오른 멘토 6명 역시 여러 질곡을 경험했다. “도티가 아니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한 강기태 여행대학 총장도 그랬다. “경남 하동의 아들”을 자처한 그의 유머러스한 말솜씨에 학생들 사이에서 큰 웃음이 나왔다. 강기태씨는 2008년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때까지 아버지를 따라 쌀농사를 지었다. 한국교원대에 진학했으나 입학하자마자 ‘교사는 도저히 못하겠다’라고 느꼈다. 그러던 중 체 게바라의 여행을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 “체 게바라처럼 여행하되 나는 트랙터와 경운기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농부의 아들이니까.”

강씨는 파워포인트로 여행 계획을 만들어 무작정 국내 트랙터 업체들을 찾았다. 후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응답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지만 군대에 갔다가 제대한 뒤에도 그는 꿈을 놓지 않았다. 애초에 13장이었던 파워포인트 자료를 38장으로 만들어 국내 트랙터 업계 관계자에게 다시 메일을 돌렸다. 천신만고 끝에 한 업체에서 연락이 와 트랙터를 후원받게 되었다. 하동군에서 출발해 국토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도중에 마주치는 농민과 어민들의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었다. 완주를 마치자 그는 지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고, 지금은 터키 횡단, 중국 종단, 미얀마 일주를 트랙터로 완료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처음 후원을 요청할 때 강기태씨는 스스로를 ‘트랙터 여행가’라고 소개했다. 자신이 만든 직업이다. 강씨는 이런 직업관을 밝혔다. “어차피 죽을 바에 죽기 전에 한번 죽을 각오로 도전해보고 싶은 것. ‘이거 하다가 죽어도 괜찮아’ 하는 일. 그런 일을 반드시 찾아봐야 한다.”

어떤 일이 하다가 죽을 정도로 괜찮은 일일까? 좋은 일의 기준을 연구하는 게 황세원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의 목표다. 지금껏 황 선임연구원은 직업을 4개 경험했다. 기자에서 홍보팀장으로, 프리랜서로, 연구원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이 찾아 나섰던 이 직업들이 몇 가지 공통점을 가졌다고 말했다. 글을 쓰는 일이었고, 자기주도적인 일이었으며, 윤리적 가치관에 맞는 일이었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황 선임연구원이 제시한 좋은 일을 찾는 비결은 이랬다. “직장보다는 직업, 직업보다는 일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일의 기준을 직장에서만 찾는다. 이렇게 찾은 일은 위험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좋은 일의 핵심을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일은 재미있는 부분과 재미없는 부분으로 나뉜다. 그 일의 핵심적인 부분이 본인 기준에서 재미있는지 빠르게 파악하는 게 좋다.” 황세원 선임연구원은 ‘좋은 일을 찾아라!’라는 보드게임을 개발했다. 각자가 일의 어떤 요소를 중시하는지, 어떤 요소를 피하는지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황 선임연구원은 “본인이 재미있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추린 뒤에는, 그 일이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지 역시 살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일이나 꿈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 지난해에 이어 드림 콘서트에 참가한 최근준 애로우애드코리아 대표는 “꿈이 없어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애로우애드코리아는 거리에서 간판을 돌리는 퍼포먼스로 광고 영업을 대행하는 회사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방황’했다는 최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대학 후배와 함께 창업을 했다. 현재 그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고용하고 있다.

최 대표는 꿈을 찾기는 어려우며, 그 과정도 멋있지 않다고 말했다. 경험상 꿈이란 “구구절절 구차하고 끈적거리고 지저분하게 엉켜 살다 보니 생기는 것”이었다. 창업 후 그는 자신이 고용한 ‘동생’들을 보며 ‘아 내가 저놈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들이 안정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다 함께 계곡으로 여행 가는 게 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생각하자”라고 말했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발견하는 일이 곧 꿈이 된다. 그는 학생들에게 “당장 꿈이 생기지 않는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훗날 ‘이게 인생이 바뀔 타이밍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유를 가질 이유는 또 있다. 직업의 변화다. 구혜빈 서울이노베이션팹랩 매니저는 “앞으로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구 매니저 자신도 본인이 하는 일을 소개하는 데에 3분가량을 썼다.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팹랩에서 일하는 분들의 직업은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각자 잘하는 분야가 뒤섞여서 새 직업이 된다. 이곳에서는 매일 새로운 직업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11월11일 서울 성동구 ‘모두다’ 사무실에서 게임을 즐기는 학생들의 모습.
팹랩은 일명 ‘공공제작소’라고 불리는 작업공간이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3D 프린터 등 디지털 기기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시민 발명가’들은 각자가 지닌 지식과 기술로 자신만의 물건을 만들어낸다. 팹랩 사람들은 수시로 아이디어와 도구를 나눈다. 전문 지식은 유튜브에서 배울 수 있다. 누구나 여러 경로로 전문 지식을 배울 수 있기에 사람마다 다른 관심사도 반영되기 쉽다. 최근준 대표처럼 구혜빈 매니저도 ‘왜’를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기술을 터득하기는 예전보다 쉬워졌지만, 그 효용은 인문학적 사고가 뒤따라야 극대화된다고 강조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뒤를 이었다. 박진 어반비즈서울 대표는 ‘도시 양봉’이라는 특이한 일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서울 한복판에서 벌을 키운다. 그는 “외국에서는 농부와 미친 사람의 중간이 양봉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나는 농촌도 아닌 도시에서 양봉을 하는, 미친 도시양봉가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여기 아니면 어디서 이런 거 해보겠어”

공기업에 다니던 박 대표의 삶은 ‘벌이 사라졌을 때’를 가상해 찍은 사진을 보고 바뀌었다. 과일·채소로 가득 찬 마트가 텅텅 비게 되는 사진이었다. 그때부터 명동 유네스코회관, 서울숲, 영국 대사관 등지에서 벌을 키우고 꽃과 나무를 심었다. 여덟 군데에서 시작한 양봉은 현재 30여 곳으로 늘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양봉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예술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그는 꿈에 대해서 “계획대로 인생을 살아가다가도,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반짝’ 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박비 모두다 대표가 마지막 연사였다. ‘셀카봉’을 들고 온 그녀는 강연을 직접 유튜브로 생방송했다. 5년 동안 내로라하는 대형 게임 회사들을 다녔지만 결국 창업을 택했다. 모두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게임을 하는 데서 출발한 회사다. 현재는 보드게임을 통해 교육을 도모하고 있다.

박 대표는 “통장 잔고는 보잘것없지만 좋아하는 일이니까 버티고 있다”라고 말했다. 버티면서 닥친 ‘미션’들을 해결하다 보니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도 할게. 이렇게 했다. ‘여기 아니면 어디서 이런 거 해보겠어’라고 생각하니까 자유로워지더라.” 최근 박 대표가 만든 유튜브 채널에서는 생리컵 영상이 히트를 쳤다. 그녀는 “앞으로 게임과 여성이라는 콘텐츠로 구독자들과 소통하는 폭을 넓혀볼까 한다”라고 말했다.

오후에 이어진 멘토별 소그룹 활동은 조금 더 편한 분위기였다. 강기태 총장은 시작하자마자 본인 휴대전화 번호를 칠판에 썼다. 최근준 대표는 자신이 겪은 청소년기의 방황을 더 구체적으로 들려줬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자신이 꿈을 이룬 과정을 두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표현을 썼다. 다른 멘토들도 오전 강의 때 못다 한 이야기를 풀었다.

11월11일과 12일에는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일일 인턴십을 운영했다. 학생들이 직접 각 멘토들의 일터를 방문해 그들의 일을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1월11일 서울 은평구 서울이노베이션팹랩에 모인 학생 6명은 3D 프린터와 여러 발명품을 둘러봤다. 같은 날 성동구 모두다 게임공간에서는 ‘보드게임을 통한 교육’을 맛볼 수 있었다. 11월12일에는 종로구 희망제작소에서는 ‘좋은 일 찾기’ 보드게임이 진행됐고, 같은 날 오후 강남구 여행대학 사무실에서는 참가 학생들이 ‘나만의 여행계획 세우기’를 했다.

온라인으로 참석자들에게 받은 만족도 설문조사에서는 “나로 인해 새로운 직업이 나왔으면 좋겠다” “직업에 대한 구체적 설명보다 진로를 찾는 과정을 들어 유익했다” 같은 반응이 나왔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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