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으로 기업에서 의무교육하잖아요. 대부분 거기서 하는 내용이 ‘상대방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본다’…. 새로운 지식은 없어요. 사실 다 알고 있는 거거든요. 누구도 성희롱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잘못인 줄 모르고 하는 거지.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성희롱 예방 교육은 성희롱하다가 X된 새끼들 인터뷰를 한 시간 동안 틀어주는 거예요. ‘내가 왜 성희롱을 해가지고 내 인생 조지고 회사에서 잘리고!’ (관객 박수) 겁을 먹잖아요. 어떻게 보면 공포가 가장 좋은 교육일 수 있으니까.”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됐던 코미디언 유병재씨의 〈블랙 코미디〉 공연 영상 내용이다. 형식적인 성희롱 예방 교육을 꼬집었다는 점에서는 공감이 갔다. 하지만 어쩐지 영상 속 관객처럼 후련하게 따라 웃기는 어려웠다. 이 뜻 모를 ‘불편함’은 어디서 온 걸까. 며칠 만에 해답을 찾았다. 한샘을 필두로 연이어 터져 나오는 성희롱 피해 호소에서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이 차갑게 와닿았다.
 

ⓒ정켈 그림

성희롱은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일어난다. 여성에게 순종과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사회, 공론화를 꺼리는 직장 분위기, 성별·나이·지위를 감안할 때 상대가 저항하기 어려우리라는 계산이 모두 맞아떨어진 결과다. 실제로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5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희롱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상급자인 경우(39.8%)가 가장 흔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정규직(6.2%)보다 비정규직(8.4%)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응답자 비중이 더 높았다.

“공포가 가장 좋은 교육일 수 있다”는 말도 한국 사회에선 아직까지 너무나 먼 얘기다. 성희롱으로 입길에 올랐던 고위 공직자의 이름은 당장이라도 여럿을 댈 수 있다. 그중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사람은 몇 명이나 있었나? 가장 앞장서서 성범죄에 맞서야 할 법조인·경찰·언론인 집단이 동료라는 이유로 가해자를 감싸는 일도 잦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이 먼저 배우는 건 공포가 아니라 무력감이다. 또한 몇몇을 엄벌하는 것만으로는 성희롱을 뿌리 뽑을 수 없다. 지금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업들이 특별히 사악한 사람들만 모인 곳인가? 직장 내 성폭력이 며칠 만에 폭발적인 이슈가 된 까닭은 이것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여성들의 공분 때문이다.

여성학자 이성은은 〈섹슈얼리티는 정치학이다〉(서해문집)에서 여성주의 조직이론가 캐서린 이친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환경이 성희롱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심각한 성차별 속에서 여성은 단순하고 비전문적인 업무를 주로 맡게 되고, 조직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면서 성희롱의 타깃이 된다. 동등한 위치에 선 동료가 아니라 주변부 약자인 ‘여’직원으로만 인식되는 셈이다. 이는 채용, 급여, 승진, 업무 배치 등 조직 전반을 대대적으로 혁신할 의지가 없다면 경영진이 아무리 ‘성희롱 재발 방지’를 외친들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등한 위치의 동료가 아닌, 주변부 약자인 ‘여’직원으로만 인식

래퍼 매드 클라운의 노래 〈커피 카피 아가씨〉에는 여대를 졸업한 스물네 살 ‘김커피’씨가 등장한다. 수차례 탈락 끝에 겨우 취업에 성공한 김커피씨. 부푼 마음으로 출근한 회사에선 부장에게 “순종적인 여자가 돼. 싫어도 아닌 척, 알아도 모른 척. 나서면 꼴불견 돼”라는 말을 듣는다. “뒤돌아 쓸개를 씹을지언정 자존심 눌러”가며 김커피씨는 외친다. “나는 일이 필요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일이 필요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일은 결국 사람다운 일터에서 나온다. 여성에게 유독 높은 취업 문턱을 넘어도 불안정한 일자리가 대부분인 추세를 감안하면 직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겪는 위협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전국의 ‘김커피’들을 위해 ‘사람다운 일터’를 만드는 일이 시급한 이유다.

기자명 양정민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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