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을 만들어왔고 그 비밀이 폭로될 때 ‘멘붕’을 겪는 일을 되풀이해왔어. 1년 전 이맘때 최순실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온 나라가 분노로 들끓었던 것도 한 예가 되겠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폭로 1주년을 맞아, 앞으로 몇 주간은 ‘이 땅을 뒤흔든 폭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1921년 3월19일, “여성 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씨의 양화 전람회(〈매일신보〉 기사)”가 열렸어. 이틀간의 전시회에 수천명이 몰릴 만큼 전람회는 대성황이었다지. 그토록 많은 시선을 모았던 화가 나혜석. 그녀에게는 깊은 사랑이 있었어. 최승구라는 시인이었지. 최승구는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이후 귀국한 뒤 3·1항쟁에 참여해 감옥살이도 경험했던 나혜석은 화가로 활동하면서 자기를 묵묵히 지켜봐온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돼. 일본 유학을 한 변호사 김우영. 그는 나혜석에게 청혼했다가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는 ‘조건’을 듣게 된다.

평생 나만을 사랑해달라는 첫째 조건이나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둘째 조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겠는데 셋째부터는 좀 수위가 올라갔어. 시어머니와 전실 딸(김우영이 사별한 부인 사이에 낳은 딸)과 같이 살게 하지 말 것. 이조차 당시 조선 사회가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의무를 송두리째 무시한 것이었지만 네 번째 요구는 정말이지 맹랑했단다. “최승구의 묘에 묘비를 세워주시오.”

나혜석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불꽃’이야. 이 불꽃같은 여자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남자 앞에서도 발갛게 달궈져 있었어. 김우영의 가슴이 그 불에 데든지 말든지. 김우영은 그 조건에 응한다. 어지간히 나혜석을 사랑했나 봐.

ⓒ민음사나혜석·김우영 부부(왼쪽)와 최린의 모습.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주렁주렁 낳고 일본 외교관으로 변신한 남편 곁에서 그녀는 꽤 행복해 보이는 시간을 보내. 당시 일본 외무성은 ‘오지’에서 고생한 외교관들에게 보상 차원에서 해외연수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는데 김우영 부부는 그 특혜의 대상이 돼.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꿈같은 유람을 하게 되는데 이 부부에게, 특히 김우영에게 악몽 같은 일이 발생한다.

부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한때 3·1항쟁 당시 민족대표 33명 중 하나였으나 일찌감치 변절했던 최린을 만나게 돼. 남편은 독일로 법학 공부를 가고 나혜석은 파리에 남아 미술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김우영은 친분이 있던 최린에게 아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군. 김우영도 나혜석의 10년 연상이었는데 최린은 김우영의 큰형님뻘이었으니 남녀 간의 일을 걱정할 일이 없다 싶었겠지. 놀랍게도 나혜석은 중년의 최린과 사랑에 빠져버렸어. 처음에는 나혜석과 최린 둘 다 뜨거웠으나 최린은 뜨거운 물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펄펄 끓을 때가 지나자 금세 식어버렸어.

그렇게 대충 마무리가 된 듯했지만 귀국 후 나혜석이 최린에게 편지를 보낸 게 소문나면서 문제가 불거진다. 내용은 별거 아니었는데 최린이 경솔하게도 편지 온 사실을 주위에 떠들었고 소문은 엉뚱한 내용으로 와전돼 김우영의 귀에 들어가면서 사태는 막장으로 치달아. 김우영은 이혼을 선언하고 나혜석을 쫓아낸 뒤 자식들과도 인연을 끊어버린다.

나혜석은 ‘음탕한 여자’로 사회에서 고립됐고 곤궁함에 시달리지. 정작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에 보란 듯이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전남편 김우영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어. 나혜석은 여기에 분노해.

이후 1934년 잡지 〈삼천리〉에서 나혜석은 실로 놀라운 폭로를 감행해. ‘이혼 고백서.’ 김우영과의 결혼 생활, 최린과의 만남과 연애, 그리고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낱낱이 털어놓은 거야. 최린과의 관계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얘기해.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 즉 C(최린)를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습니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중심 되는 본부인이나 본처를 어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적인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휴먼시티 수원 〈어린이 마당〉〈삼천리〉에는 나혜석의 폭로가 담긴 ‘우애결혼, 시험결혼’ ‘이혼 고백서’가 실렸다.

남편과 ‘조선 남자’에게 겨눈 화살

드라마 속 바람둥이들을 보면서 “인간도 아니야”를 연발하는 네게는 나혜석이 이상한 여자로 보일 수 있을 거야. 남편 아닌 남자를 사랑했고 그 후로도 경솔하게 행동해 남편에게 상처를 줬으니까. 아빠도 그녀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만 나혜석이 저렇게 말할 때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90년 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무모하다고 할지 용감하다고 할지, 그녀는 남편과 ‘조선 남자’에게 화살을 겨눈다. 자신들은 대놓고 일탈을 즐기면서 여자의 일탈은 하늘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는 듯 펄펄 뛰는 남자들에 대해.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합니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상대자의 잘못을 논할 때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남자라는 명목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가졌으니 사회제도도 제도려니와 몰상식한 태도에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 아아. 남자는 평소 무사할 때는 여성이 바치는 애정을 충분히 누리다가 체면이나 법률 앞에 서면 어제까지의 방자하고 즐거움을 누리던 몸을 돌이켜 오늘의 군자(君子)가 돼 점잔을 빼는 비겁자요 난폭자가 아닙니까. 우리 여성은 모두 이런 남성을 저주합니다.”

아마 그녀가 조금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녀의 폭로는 더 많은 호응을 불러왔거나 ‘영웅’으로 떠올랐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여자들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어. 그녀는 이혼한 남편과 가족들은 물론, 자신을 보석같이 아꼈던 친정 오빠에게도 버림받았고 외롭게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녀가 이혼 고백서를 통해 자신의 가슴속을 풀어헤친 지 불과 14년 뒤인 1948년의 일이었지. 이혼 고백서를 쓰고 세상에 내보내면서 그녀는 그 최후를 예감했을까. 그녀는 고백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거의 다시 일어설 기분이 없을 만큼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같은 운명의 줄에 얽혀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나혜석은 이혼 고백서뿐 아니라 그녀의 삶을 통해서 봉건적 속박의 창살에 여전히 갇혀 있던 여성들의 고통, 지극히 편파적으로 작용했던 도덕이라는 이름의 위선, 자신들의 일탈은 ‘영웅호색(英雄好色)’이나 여성들의 일탈은 돌이킬 수 없는 죄로 몰았던 남자들의 비겁함을 골고루 고발했어. 너도 그녀의 이혼 고백서를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한 번쯤은 그 삶을 찬찬히 살펴볼 만한 여성 나혜석의 필생을 건 폭로를 말이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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