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초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발족 이후 ‘혁신성장’ 관련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혁신성장은 기술 등 생산조건 혁신을 통한 경제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생산조건 개선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라는 주장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문제는 혁신성장이 ‘소득주도 성장’과 상반된다는 다음 같은 주장들이 돌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총수요 증가로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분배정책에 불과하다. 공급을 늘려 성장을 추동하는 공급 측면의 혁신주도 성장정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들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혁신하자’고 주장할 뿐, 어떻게 해야 혁신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더욱이 소득을 혁신이나 성장과 무관한 변수로 본다. 그러니까 소득주도 성장론을 ‘순수한’ 분배정책으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연합뉴스10월18일 문재인 대통령이 ‘일자리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혁신성장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혁신이 과연 무엇인지부터 따져보자. 혁신은 우선 생산성 상승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규모의 요소(자본·노동 등)를 생산에 투입했는데도 산출량이 늘어나는(=경제가 성장하는) 경우를 ‘생산성 상승’이라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생산성 상승이 정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지난 9월 초 서울에서 열린 국제 콘퍼런스에서 권남호 박사(한국조세재정연구원) 등이 발표한 논문(〈발명, 생산성, 그리고 동아시아 혁신시스템의 미래〉)에 따르면, 한국의 연구개발(R&D) 지출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GDP 대비 연구개발비’ 기준으로 보면 2003년엔 미국을, 2008년엔 일본을 추월했다(아래 그림 참조). 하지만 정작 한국 경제의 생산성(총요소생산성 기준)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미국의 60%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엄청난 규모로 연구개발비를 지출하고 있는데도 생산성은 크게 올라가지 않는다. 더욱이 생산성을 높여봤자 그것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효과는 미미하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정혁 교수의 논문(〈고전파 성장모델의 시각에서 평가한 한국 경제성장 경험〉)에 따르면, ‘실질성장률에 대한 생산성 상승의 기여도’가 최근 5년 동안(2010~2014년) 20%에 불과했다. 한국 경제가 100쯤 성장했다면 그중 20 정도만이 생산성 상승 덕분이라는 의미다. 무서운 일은, 이전 10년 동안(2000 ~2009년) ‘실질성장률에 대한 생산성 상승의 기여도’가 55%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 경제는 엄청난 연구개발 투자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상승 폭이 작은 데다, 어렵게 높인 생산성까지 경제성장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상태다. 더욱이 생산성 상승이 성장에 기여하는 정도마저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나는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을 혁신(=생산성 상승)에 대한 협소한 시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혁신은 사회와 격리된 연구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 실험실에서 엄청난 첨단기술 등 ‘혁신적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해도, 그것이 해당 국가의 현실에서 ‘경제적 이익’을 발생시킬 수 있도록 실용화하는 데 실패하면 무용지물이다. 그 ‘혁신적 아이디어’가 실제 생산에 적용되고 이에 참여한 수많은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실패와 성공, 개량의 경험을 쌓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경제발전에 필요한 지식이 축적된다. 이와 함께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그중 하나가 소득 변동이다)도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 또한 혁신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한다.

‘일자리 중심·소득주도 성장론’이 바로 혁신

예컨대 ‘1차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은 물론 그와 함께 진행된 사회·경제 구조의 변혁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당시에는 기계제 대공업(기술혁신)의 보급과 함께 자본-임금노동 관계(사회구조의 변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2차 산업혁명의 중심인물로 지목되는 헨리 포드는 1910년부터 생산 라인에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해서 생산시간 단축과 더불어 자동차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췄다. 1908년 850달러였던 자동차 가격이 17년 뒤인 1925년에는 250달러로 하락했다. 이로 인해 미국 대다수 가정이 1930년대에는 자동차를 보유하게 된다. 이런 ‘자동차 혁명’은 사회구조의 변화로 이어진다. 포장도로가 필요해지면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개발되는 등 연관 산업이 발전하고, 도시와 농촌이 연결되면서 소비·생활 행태(슈퍼마켓·여가 여행·교외의 주택가 등)가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헨리 포드는 ‘소득주도 성장론’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는 1914년 1월 직원들의 노동시간을 하루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인 반면 최저 일당은 2.35달러에서 5달러로 2배 이상 인상했다. 포드는 언론 인터뷰에서 “노동자가 새벽부터 밤까지 작업장에 있어야 한다면 자동차를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본가로서 포드는 노동자에게 소득과 시간을 보장해줌으로써 자동차 판매를 촉진하려 했다.

또한 혁신의 경로는 다양하다. 오직 새로운 기술의 발명만이 혁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국이지만 세계 5위 통상 대국인 네덜란드의 역사적 경험이 좋은 사례다. 네덜란드가 해상무역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청어의 저장 기술을 개발한 덕분이다. 이 기술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14세기의 한 어부가 주머니칼로 청어의 내장과 머리 부위를 분리한 뒤 통조림하는 방법을 창안했던 것이다. 이후 네덜란드는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의 청어 시장을 석권하면서 해상무역 대국으로 성장한다. 15세기에는 선박세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당시 선박세는 갑판 너비에 따라 부과), 갑판은 좁지만 중간 부분이 깊고 넓어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배를 설계해 최저 운송비를 실현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귀족들의 세금 부과를 피하기 위해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는데, 이는 도시인구의 급증으로 상업 부문의 발전에 기여한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이르러 이전의 강국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처럼 세계 역사에 나타난 혁신의 경험을 보면, 필요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 아이디어가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실용화되면서 사회 개혁과 함께 나아갈 때 비로소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계층 간 시장 소득의 격차가 계속 확대되는 가운데 사회안전망까지 미비해 양극화가 급속히 심화되어왔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사회적 안정성은 물론 경제성장까지 위협하는 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더욱이 제조업의 해외 이전에 따른 ‘고용 없는 성장’과 일자리의 질 또한 사용자 중심의 노동시장 관행 때문에 바닥으로 끝없이 떨어져왔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려면, 경제 시스템은 물론 사회 전반의 작동 방식까지 전반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일자리 중심·소득주도 성장론’의 현실 인식이다. 그 개혁 방안이 바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을 통한 사회 서비스의 양과 질 개선’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고용·교육·복지 등에서 사람에 대한 투자 늘리기’ 등이다. 이를 통해 부당한 차별을 없애고 도전 의식을 부추겨야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총수요를 증가시켜야 기업 투자의 확대로 경제적 선순환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일자리 중심·소득주도 성장론’은 그 어떤 ‘혁신성장’ 정책보다도 오히려 혁신 친화적인 수단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기자명 김용기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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