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규정돼 있다.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칭하는 북한 정권이 70년간 휴전선 이북을 통치해왔지만 적어도 헌법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거지. 북한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우리나라를 ‘남조선 괴뢰’라고 부르며 자신들이 해방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되뇌어왔어.

휴전선 이남과 이북의 정권은 공히 서로에 대한 경계와 증오를 권력의 근간으로 삼았다. 남한에서 ‘빨갱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나 북한에서 ‘반동분자’ 딱지가 붙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나라 전체가 감옥이라고 해도 무방한 세월이었어. 그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휴전선 넘어 ‘귀순(歸順)’해오기도 하고 반대로 ‘월북(越北)’을 감행하기도 했다.

요즘이야 북한에 살러 가겠다고 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월북은 그리 진귀한 일이 아니었고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빈번한 사고였단다. 휴전선까지 가는 교통수단조차 여의치 않던 시절에는 비행기나 배를 납치해서 북으로 올라가는 일도 있었지. 그중 가장 황망하고 어이없는 사건으로 ‘경주호 납치 사건’을 들 수 있을 거야. 경주호 납치 사건은 1960년 12월16일, 세월호 참사로 우리 귀에 익은 ‘맹골수도’에서 일어났다.

경주호는 목포에서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이었어. 자정 무렵 승객 몇 명이 선장 면회를 요청했다. 별 생각 없이 나온 선장은 기겁을 했어. 갑자기 그들이 칼을 꺼내들고 목을 겨눴기 때문이야. 선장과 무선사를 화물칸에 가둔 납치범들은 조타수에게 중공(中共: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가자고 윽박질렀어.

납치범들은 무려 26명이나 됐어. 납치를 주도한 건 네 명의 좌익 전력자들이었고 그중 셋은 학교 교사이거나 전직 교사였다. 그들은 가족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동조한 학생들까지 데리고 배에 탔고,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부와 그 가정부가 업고 있었던 두 살배기 아기(납치범 중 하나의 아들)까지 포함된 일행이었지. 승객 가운데에는 군인들도 있었지만 납치범 일당의 수가 너무 많았어. 저항하던 제주도 출신 병사 두 명은 그만 납치범들의 칼에 찔려 바다에 던져지고 말았어. 오성택 상병과 김오채 일병이었다.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여객선을 통째로 납치해서 ‘중공’으로 무작정 가자고 한 이 대책 없는 납치범들은 곧 엔진을 고장내버리거나 지그재그 항해로 눈속임을 하는 승무원들의 방해에 부딪쳤고, 여객선을 몰고 가는 일이 여의치 않자 어선을 탈취해 달아나려 했으나 끝내 체포되고 말았어. 어린아이까지 낀 26명의 해상 납치단. 그들의 어설픈 납치극 와중에도 군인 두 명의 소중한 생명이 희생됐다.

1959년 한국 민간 항공기였던 창랑호는 권총을 휘두르는 범인들에 의해 납북됐어. 북한은 승객들을 돌려보냈지만 기체는 돌려주지 않았지. 1969년 12월에는 강릉에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기가 납치됐어. 남한은 고정간첩, 즉 북한의 스파이에 의한 납치라고 주장했고 북한은 조종사들에 의한 의거 입북, 즉 조종사들이 북한으로 자진해서 넘어온 거라고 우겼어. 그 주장을 입증하려고 그랬는지 승무원 등 11명을 영영 돌려보내지 않았단다. “북으로 기수를 돌려라!” 하는 공포의 외침은 그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어. 1971년 1월 속초에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여객기 안에서 재차 악몽 같은 하이재킹(비행기 납치)이 일어났던 거야.

ⓒYouTube 갈무리1971년 1월15일 속초발 서울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강원도 고성군 초도리 해변에 불시착했다.

나이 스물셋의 김상태라는 청년이 범인이었어. 대관절 당시 화물 검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기수를 북으로 돌리라고 협박하며 조종실 문짝을 폭탄으로 날려버렸어. 기체에는 구멍이 뚫리고 기내는 아수라장이 됐어. 조종사들은 범인의 눈을 속이고 근처 공항에 착륙하려 했지만 범인은 이를 눈치채고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아우성을 쳤지.

1969년 비행기 납치 사건 이후 대한항공은 국내선 비행기에 권총을 지닌 보안요원을 배치했다. 보안요원이 그 비행기에도 탑승해 있었지만 범인이 폭탄을 들고 설치니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어. 범인이 든 폭탄의 안전핀이라도 풀리면 비행기는 꼼짝없이 공중 폭발할 테니까. 기장의 무전을 듣고 따라붙은 공군 전투기의 저지도 헛되이 비행기는 계속 북으로 향했고 몇 분 뒤면 휴전선을 넘을 상황에 이르렀단다. 기장은 휴전선을 넘기 직전 모래사장에 비행기를 불시착시키기로 결심하고 불시착 시도 중 틈을 보아 범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보안요원에게 은밀히 내렸어. 비행기가 급강하하는 순간 총성이 울렸지. 보안요원의 사격은 정확했고 김상태는 고목나무 넘어가듯 쓰러졌지.  

“죽어도 내 할 일은 내가 한다”

문제는 폭탄이었어.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 안전핀이 풀려버린 거야. 그때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수습 조종사 전명세가 몸을 던져 폭탄을 감쌌어. 굉음을 내며 폭탄이 터졌고 전명세 조종사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중상을 입었지만 그 덕분에 기체에는 큰 타격이 없었다. 비행기는 휴전선 코앞의 한 모래사장에 기적적으로 내려앉았어. 급히 헬기로 병원에 이송된 전명세 조종사는 의식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소리를 계속 질렀다고 해. “승객이 위험하다. 폭탄! 폭탄!” 그리고 그건 그의 유언이 되었어. 나이 마흔의 수습 조종사는 깨어나지 못하고 말았어.

ⓒYouTube 갈무리전명세 수습 조종사는 바닥에 떨어진 폭탄에 몸을 던져 승객들을 구하고 순직했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그는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 서울로 유학하라는 부모에 맞서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용정의 광명중학교로 가겠다”라고 고집을 부렸다는 그는 분단 이후 월남했고 육군 헌병으로 6·25 전쟁을 겪었다. 한때 인민군의 포로가 됐는데 거기서 인민군 장교가 되어 있던 광명중학교 동창을 만나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고 해. 이후 육군 항공대에서 군용기 조종간을 잡았고 제대 후에는 대한항공에 입사해 수습 조종사로 일하고 있었어. 그의 형이 대한항공 전무여서 수습 딱지를 빨리 떼는 등 혜택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안 건 전명세 조종사의 장례식장에서였어. “죽어도 내 할 일은 내가 한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그렇게 곧고 강직했다.  그래서 안전핀 빠진 폭탄에 몸을 던질 수 있었겠지만.

무슨 사상을 지녔든, 어떤 배경이 있든, 배나 비행기를 납치해 북으로 가자고 사람을 죽이고 무기를 휘두른 이들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어.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공포에 떨게 했고 가족과 생이별시킨 중범죄자들이니까. 그 범죄자들에 맞서서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을 아빠는 기억하고 싶구나. ‘반공(反共)의 화신’보다는 자신의 임무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용기의 현신’으로서 말이야.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김만섭(송강호) 운전사가 전쟁터가 된 광주로 돌아가면서 딸과 통화했던 내용 기억나니?  울먹이듯 김만섭은 얘기했지.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거창한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할 것 없이 손님을 모시고 어딜 갔다 돌아오기로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택시 운전사의 책임이었고 김만섭은 그 책임감에 용기를 실었다. “항공기와 함께 늘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때문에 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별로 없었던(부인의 회고)” 전명세 기장(그는 사후 기장 직급을 추서받았어)이 마지막으로 절규한 말이 “승객들이 위험하다!”였던 것처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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