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이 올해로 100주년이 되었다. 지난해의 촛불집회와 탄핵 정국에 이어진 조기 대선에 관심을 쏟느라 여력이 없는 건지, 10월혁명으로 눈에 띄는 특집을 마련한 잡지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주의자들의 거점인 격월간 〈녹색평론〉 7·8월호에 실린 특집은 특별했다. 이 잡지는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박노자, 앨런 우즈, 와타나베 교지의 글을 실었다.

ⓒ이지영 그림

앨런 우즈에게 러시아 10월혁명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러시아혁명은 수백만의 남자와 여자들이 인류사상 최초로 착취계급을 전복시키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쥐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과업을 시작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현대세계로 이끌고, 공장과 도로와 학교를 건설하고, 남자와 여자들에게 교육 기회를 베풀고, 우수한 과학자들을 양성하고, 히틀러를 패퇴시키고, 우주 공간에 최초로 인간을 쏘아 올린 것은 1917년 10월에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내던져진 퇴영적인 러시아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국유화된 계획경제 시스템이었다. 소련은 후진적이고 반봉건적인 경제로부터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산업국가로 급속히 변신하였다.”

러시아혁명의 성패를 결산할 때, 항상 언급되는 논쟁이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다. 10월 혁명의 이상을 옹호하는 이들은 전시와 혁명이라는 어렵고 혼란한 상황에서 레닌이 노동자의 자율성과 당의 민주적 원칙을 지키려고 분투했던 반면, 후계자였던 스탈린은 그렇지 못했다고 선고한다. 이들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연속성이 없으며, 스탈린에 의해 혁명이 배반당했다고 항변한다. 딱히 영웅사관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혁명 지도자의 역량과 품성이 혁명의 과정과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인정된다. 하지만 박노자는 레닌과 스탈린이라는 개별 인물에 함몰하는 설명을 피한다.

박노자는 러시아혁명이 프랑스혁명과 같은 궤도를 차근차근 밟아왔다면서 “1920년대 말에 러시아형 급진적 자코뱅 독재는 스탈린 독재로 교체되었다. 궤도 자체는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았지만, 그 기간이 대단히 길었다는 것은 프랑스와의 차이점이었다”라고 말한다. 프랑스혁명 시기의 자코뱅 독재가 보여주듯이 혁명은 혁명의 성취를 온전히 보존하고 완수시키는 데 필요한 급진적 전위의 독재가 필요하다. “‘비상 상황’만이 혁명이 변혁시킨 질서를 착근·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프랑스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역할을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이 떠맡았으며,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등장한 나폴레옹에 해당하는 인물이 고르바초프(개혁기)와 옐친(표면적 민주주의기)의 뒤를 이은 푸틴이다.

“긍정적·부정적 교훈 철저히 학습해야”

10월혁명이 일어날 당시 러시아는 현재의 파키스탄보다 뒤처진 사회였다. 스탈린 시기에 러시아는 사실상 부르주아혁명의 과제인 공업화와 도시화, 종교와 국가의 분리, 군사 증강, 보편적 국민·인민 교육의 실시 등을 수행했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한 이후 프랑스혁명의 몇몇 이상이 나폴레옹 법전에 반영되었듯이, 보수적 독재의 길을 걷는 푸틴 역시 10월혁명의 성취를 다 내버리지 못했다.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무상 의료와 교육은 여전히 유효하며, 제정러시아 시대의 국교 등은 부활하지 않았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2012년 실시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중복 응답). 스탈린(49%), 레닌(37%), 표트르 대제(37%), 푸슈킨(29%), 마르크스(4%) 순서였다. 월터 라쿼의 〈푸티니즘〉 (바다출판사, 2017)에서 이 조사 결과를 좀 더 음미할 수 있다.

이 혁명에 대한 오해는 무척 많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1991년 소비에트연방(구 러시아)이 해체되면서, 러시아혁명의 이상도 영향력도 함께 종언했다는 선동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10월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는 풍부하다. 먼저 매우 기묘하게도 러시아혁명은 초기의 볼셰비키가 낙관적으로 고대했던 것처럼 유럽 핵심부로 혁명이 확산되지 못했다. 서구의 주변부였던 러시아가 그랬듯이, 10월혁명은 서구의 지형을 바꾸어놓기보다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거나 봉건제를 벗어나지 못한 아시아· 중동·인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의 지도를 바꾸었다.

중국은 10월혁명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공산당은 소비에트를 따라서 비시장적인 경제개발을 통한 근대화를 선택했다. 중국은 자본주의와 세계시장 체제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랫동안 보여주었다. 소련은 경제와 정치를 아우르는 전면적인 개방을 시도한 나머지 연방이 해체되고 말았지만,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 관료 주도 개발주의의 운전대를 놓치지 않는 중국의 경제개방 정책은 미국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성과를 이뤘다. 또 지금은 김씨 왕조로 변질한 북한을 누구도 10월혁명의 이상 아래 성립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말하지 않지만, 번질나게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면서 동북아 정세를 뒤흔들어놓는 북한도 러시아혁명의 남아 있는 흔적임에 분명하다.

〈러시아혁명사 강의〉
박노자 지음
나무연필 펴냄
10월혁명은 유럽 핵심부에서 한 차례의 혁명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한 나라에 혁명 정권을 세우는 것 이상으로 서구 세계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이 분야의 고전인 E. H. 카의 〈러시아혁명-1917~1929〉(이데아, 2017)에서 인용한다. “소련의 명성은 1929년 가을 자본주의 세계를 엄습한 경제위기 때문에 더욱 높아졌다. 소련이 위기의 최악의 징후 몇 가지를 면하자 이제 어느 국민경제도 시장의 철칙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더욱 커졌다.”

소비에트가 붕괴되자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가 주기적인 내적 붕괴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통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대중에게 실업·빈곤·사회복지 축소·긴축재정· 전쟁과 갈등을 강요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명제가 가장 시의적절한 때는 지금이다. 〈러시아혁명사 강의〉(나무연필, 2017)에서 박노자는 이렇게 청년들에게 권한다. “후기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상위 15~20%를 제외하면 다음 세대의 경제 상황은 그전 세대보다 더더욱 악화될 겁니다. 어쩌면 1917년 이전 제정 러시아의 고숙련 노동자들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회라면 새로운 혁명의 파도가 몰아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러시아혁명이 남긴 긍정적·부정적
교훈을 철저히 학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과거 속에 미래의 씨앗이 있으니 말입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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