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언론학 박사)

1989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한국 언론이 지형의 대변화를 예고하며 술렁이던 그해 연말, 나는 원(原) 〈시사저널〉 경영진의 거듭한 초빙에 응하여 〈한국일보〉를 떠나서 제작 총책임자 및 이사진의 일원이라는 직책을 맡아 부임했다.

원 〈시사저널〉은 창간 슬로건 밑에서 비(非)를 비라 하여 타협하지 않고 사상(事象)을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젊은 기자들의 근성이 하나의 매체 문화로 뿌리를 내리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편집·경영 책임자인 나 자신은 새벽 3시 퇴근, 아침 7시 출근을 강행하며 장년기의 에너지를 몽땅 쏟아부었다. 우리 구성원은 의욕적이고 모험적인 실험을 거듭했다.

주로 정보 수집 과정에 의존하는 언론의 일반적 관행을 뛰어넘어 미술적 요소를 제작의 중심에 두고 판면(포맷)을 구성하는 지면 구축 회의를 비롯해서 끝장토론(브레인스토밍) 등 새로운 편집국 제작 체제를 확립했다. 하나하나의 기사 항목과 하나하나의 지면은 취재·미술·사진 세 부서의 담당자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교차 논의를 거쳐서 확정하는 방식이다. 곧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다양성의 조화미를 시각 뉴스 보도의 바탕으로 삼는 제작 전략이다.

기자들의 개성은 서로 부딪쳐서 불꽃을 일으켰다. 상호 논쟁을 벌이고 서로 경쟁하고 자기 직무에 가치를 부여하는 기자들의 투혼은 새로운 저널리즘을 실천하기 위한 산고로 여겨졌다. 그 기자들을 보고 나는 마치 ‘몽골 기병’처럼 다부지게 기동한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혁신적 편집국 체제하에 개성적인 기획물을 운영한 결과, 창간 1년 만인 1990년 10월16일에 정기구독은 10만4181계좌에 이르러 잡지 사상 유례가 없는 기록을 세우며 단기에 국내 최고의 시사 주간지 자리를 확립했고 1995년 6주년 만에 최고 14만3000계좌에 달해 원 〈시사저널〉 절정기를 맞았다.

나는 후임 편집국장인 작가 김훈이 쓴 글귀를 기억하고 있다. 1996년 내가 원 〈시사저널〉을 떠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연 환송회 자리에서였다. 김훈은 4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환송사 원고를 들고 일어서더니 읽어 내려갔다.

“…오랫동안 저희들 기자의 선배이자 생업의 선배이신 안 선배님과 함께, 안 선배님 밑에서 지지고 볶고 또 볶고 끌탕에 끌탕을 거듭하며 살아왔던 세월은 언제나 저와 저의 동료들을 눈물겹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끌탕 속에서도 기자의 자세와 정신으로 다시 주변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시사저널〉을 떠받치고 나온 세월들에 대해 저희들은 안 선배님과 함께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훈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강조하는 저널리즘의 현장주의와 기사 작성에서의 리얼리즘 정신에 김훈을 비롯한 많은 후배들이 동의하고 그것을 직업의 지표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몽골 기병 같은 기자들의 〈시사IN〉 창간

2007년 2월 원 〈시사저널〉의 몽골 기병 출신 기자들이 단행본 〈기자로 산다는 것〉을 출판했을 때 나는 그 머리말을 썼다. 제목은 ‘단절된 맥박을 고동치게 하라’였다.

그 책은 본래의 〈시사저널〉에서 정열과 땀과 눈물로 제작에 전념한 경험들을 수록하여 내용이 마치 수호지같이 생생했다.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날 나는 첫머리에 인사말을 했다. 나는 〈시사저널〉 기사를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 그러므로 전직과 현직의 몽골 기병 기자들 모두의 개성과 기사 솜씨를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사저널〉 전반기와 중반기는 절정을 누린 호시절이었으나 IMF 외환위기 이후 경영자가 바뀐 후반기는 몽골 기병 기자들에게 간난신고로 점철된 위기의 시기였다.

어느 날 〈시사저널〉 몽골 기병 기자들은 옥쇄를 앞두고 노보 홈페이지에 비장한 결의로 22인 전원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한 장을 올린 뒤 〈시사저널〉과 결별하고 편집국에서 짐을 뺐다. 마침내 그들은 ‘참언론실천기자단’을 구성하고 원 〈시사저널〉의 언론 정신을 계승하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시사IN〉을 창간한다고 선포했다. 〈시사IN〉은 사원주와 국민주 형태를 사업의 토대로 삼았다. 나는 몽골 기병 출신들이 창간한 〈시사IN〉의 새 출발을 보며 〈내일신문〉 기명 칼럼(2007년 9월4일자)에 다음과 같은 격려사를 썼다.

“〈시사IN〉 오밤중에 발진하다. 〈시사IN〉 만수천산(萬水千山) 고생길을 가는 거다. ‘시사인(人)’ 험산을 올라 설산을 기고 급류를 건너고 대하를 헤엄쳐 이윽고 동녘이 튼다. 서쪽 놀이 져도 그 행진을 멈추지 말라.”

 

 

안병찬
1962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사이공 특파원,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며 언론계에서 ‘저널리즘의 철저한 행동성과 다부진 추진력’으로 정평을 얻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역사성과 문학성을 지양하는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을 신봉해 1975년 4월30일 사이공 최후의 상황과 정면 대결하면서 처음으로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을 실험하고자 했다. 1989년 원 〈시사저널〉 창간에 합류해 시각적 뉴스 주간지의 지평을 열었다. 정치언론학 박사로 경원대 교수, 언론인권센터 이사장을 지냈다. 〈사이공 최후의 새벽〉 〈중공·중공인·중공사회〉 〈신문기자가 되는 길〉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안병찬-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의 탐험〉 〈미디어와 사회〉 〈뉴스 저널리즘 실무 특강〉 등을 펴냈다.
 

 

 

기자명 안병찬 (원 〈시사저널〉편집국장, 주필,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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