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2007년 소설가 김훈이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상으로 옮겼다.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의 포위에 맞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의 47일 항전과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 과정을 다뤘다. 원 〈시사저널〉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김훈 작가가 소설을 탈고하던 시점은 〈시사IN〉 창간 무렵이었다. ‘김국(원 〈시사저널〉 식구들이 김훈 전 편집국장을 부르는 애칭)’은 〈시사저널〉 사태가 터지자 “30년 전 내가 무너졌던 자리에 후배들이 섰다. 책임을 지고 다시 일어서달라”며 파업과 〈시사IN〉 창간을 응원·독려하기도 했다. ‘김국’을 경기도 일산에 있는 집필실에서 만났다.

ⓒ시사IN 윤무영원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거친 소설가 김훈을 후배들은 ‘김국’이라 부른다.


영화 〈남한산성〉을 관람한 소감은?

비록 내 소설을 원작으로 했을지라도 영화를 원작의 틀에 맞춰서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영화의 문법과 소설 문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니 내가 표현하지 못했던 많은 걸 영상으로 나타냈더라. 내 소설에 나오는 언어는 문자에 불과하고 그것은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영화에서는 그게 살아 있는 인간의 보이스(voice), 육성으로 나오니까 관념의 탈을 벗어나 육화되는 과정을 보여줬는데 매우 인상 깊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걱정되는 일은 없었나?

내가 소설에 쓴 문장, 특히 대사는 한문투가 많고, 거대 담론이고, 조선 시대 사대부 언어다. 지금 통용되지 않는 언어다. 그것 때문에 처음엔 이걸 영화로 만든다는 게 매우 위태롭다 생각하고 주저했다. 과연 저것이 제대로 전달될까 싶었는데 영화를 보니 어느 정도 되더라.

소설에서 주목했던 남한산성의 역사적 교훈이라면?

나는 소설 〈남한산성〉을 쓸 때 전혀 독자가 호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우리 독자들은 민족의 치욕과 패배를 받아들이는 데 훈련이 안 돼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남한산성은 우리 민족의 패배와 치욕에 관한 일이다. 우리나라 문화와 역사는 패배와 치욕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특히 대부분의 소설은 승리와 영광을 다룬다. 내가 앞서 쓴 〈칼의 노래〉도 그랬다. 그런데 내 우려와 예측은  틀렸다.

예측이 빗나갔다?

많은 독자가 소설을 보았다. 놀랐다. 역시 독자들은 내가 몰랐던 이해력이 있구나 싶었다. 어떤 민족의 역사도 영광과 자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거긴 반드시 치욕과 패배가 있다. 그걸 딛고 넘어서는 과정이 있는 거다. 이번 영화도 관객이 많이 들어오는 걸 보니까 그 치욕과 패배, 그 너머에 대한 많은 관객들의 이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점을 느꼈다.

소설과 영화에서 양극단에 섰던 김상헌(척화파)과 최명길(주화파)을 모두 충신 이미지로 그리려 했다는 지적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양극단이 적대하는 세력처럼 보이지만, 400여 년이 지난 오늘 되돌아보면 어느 한쪽은 선이고 어느 한쪽은 악이 아닌, 한 사태의 양면일 뿐이다. 결국 임금은 투항했지만 그 임금은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을 간 거다. 그것 외에 길이 없었다. 최명길이 임금을 투항시키는 데 김상헌 같은 사람이 있어야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틀이 완성되는 거다. 양쪽이 다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 교육에서는 주화파 최명길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데?

우리 역사가 학생들을 편파적으로 가르치는 거다. 사육신의 예만 해도 그렇다. 사육신은 충절을 지키다 사형당해 만고에 존경받는 충신이 되었다. 그 당시 사육신 쪽이 아닌 신숙주 등 살아남은 많은 지식인이 세조에게 붙어서 벼슬을 받고, 여진을 몰아내고, 일본과 관계를 회복하고, 〈경국대전〉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등 조선 재건 사업에 앞장섰다. 사육신 같은 신하들만 데리고서는 나라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필연이라는 걸 가르쳐줘야 한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만 가르치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 대립도 그렇게 보나?

척화파 김상헌이나 삼학사(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간 홍익한·윤집·오달제)가 조선 성리학이 길러낸 최고의 멋진 선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은 인조가 가는 길이다. 인조가 만백성을 데리고 삼학사의 뒤를 따라갈 수 없는 거지. 그 길은 삼학사가 가면 된다.

그때와 북핵 위기 국면의 현재 정세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심정적으로야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정확히 빗대 말할 수는 없다. 그때는 명나라·청나라 교체기에 조선이 혼란에 빠진 건데, 조선 지식인들의 주류는 명·청 대립을 순수하게 ‘세력 대 세력’의 대립으로 보지 못하고 ‘문명 대 야만’의 대립으로 본 것부터 큰 착오였다. 청이 야만이라 상종하지 못하고 명만 모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성리학적 지식인들 세계관의 한계였던 거다. 청은 야만족이 아니다. 나중에 얼마나 큰 문화를 건설하는가. 조선의 사대부에게 시대감각이 없었던 거다. 인조 투항을 전환점으로 삼을 수 있었지만 사대부들은 여전히 주자학에 몰입돼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 오랑캐를 다 부숴야겠다고 북벌로 간다. 그 뒤 100년이 지나서야 조선 최고 엘리트들 사이에 청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인조 투항, 북벌론, 북학 전개는 조선 사회의 역동적 모습이라 할 수 있지만 북학 이후엔 현실 전환에 실패해 결국 구한말 나라가 망했다.

현 시국과 굳이 비교해본다면?

가령 병자호란 때 조선의 지식인들이 진리라고 떠받든 명나라와의 관계는 지금 말하면 한·미 동맹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한·미 동맹에 의지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살고 있잖나. 그런데 이것이 영원불변한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미 동맹은 한 시대의 삶을 보장하는 방편일 뿐, 언젠가 벗어나는 과정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 대해서 우리는 대비를 안 한 거다.

대비를 안 하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나 북한은 핵 강국이 됐다. 남한은 경제대국이 되어 부딪치고 있다. 어찌 보면 70년 세월이 헛되이 지나간 거다. 그 70년 동안 적대 관계를 해소하려 노력했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됐을 것 아닌가. 결국 양쪽이 민족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파국, 존망의 기로에 이르렀다. 그게 가장 비통한 거다.

기자를 그만둔 뒤 늦깎이 소설가로 등단해 문단의 거목이 되었다.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나?

거목이 아니고 묘목이다(웃음). 나는 소설가가 꿈이 아니었다.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다.

언론인 경험이 소설에 영향을 미쳤나?

사실적 정황을 묘사할 때 언론인 경험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장에서 수다 떠는 걸 제일 싫어한다. 되도록 짧게 한마디로 딱 정리한다. 형용사나 부사 안 쓰고 문장의 뼈다귀만 쓴다. 주어·동사·목적어 중심으로 프레임만 짜려는 것은 역시 기자 시절의 습관,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거 같다.

ⓒ시사IN 포토〈시사IN〉 창간 고사에 참석해 후원금을 기부하고 있는 소설가 김훈.

황석영·조정래 작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안다.

황석영 작가는 〈한국일보〉에 소설 〈장길산〉을 연재할 때 내가 담당 기자라 뒷바라지한 거다. 조정래 선생은 소설 〈태백산맥〉이 공산당을 찬양했다고 고발당해 검찰에 끌려갔는데 동행했다. 그때 기자가 한 명도 안 붙더라. 사진기자도 아니니 검찰 출석 사진을 찍으려 해도 카메라가 없었다. 그래서 막 뛰어가서 열 번 찍으면 끝나는 일회용 카메라를 사와서 찍었다. 〈태백산맥〉 사건은 불기소로 잘 처리됐다. 검찰은 이미 수백만명의 독자가 읽어서 기소할 수 없다고 했다. 조정래 선생은 독자가 살려준 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

권력의 야만적 속성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야만이 고도로 조직화된 거다. 국가권력이 개입해서 정권의 일상적인 업무 일환으로 제도화했다는 거 아닌가. 참 무서운 일이다. 전에는 제도화가 아닌 음성적으로 몇몇 공작원이 했다면 이제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공무원을 동원해 예산 주고 한 거니까 한마디로 ‘악을 제도적으로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적폐를 바로바로 그때그때 공개하지 못한 것은 언론의 책임도 크다.

아직도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쓰는데 이유는?

연필로 쓰면 힘이 들어간다. 육체의 힘으로 글을 밀고 나간다는 확신성이 있다. 육체감이 없으면 글을 못 쓸 거 같다. 자랑이 아니고 내가 낙후된 거다. 내 사무실에는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없다. 나는 신문물에 적응하는 능력이 좀 떨어진다. 4차 산업혁명도 한 나라로서는 먹고살 게 없어지니까 해야 하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그거 좀 안 했으면 한다. 이만하면 나는 충분히 편리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김훈체’라는 컴퓨터용 한글 서체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할 계획이라는데?

요새 육필로 원고 쓰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걸 보존하려는 거 같은데,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하더라. 글자체 만들어서 무료로 쓸 수 있도록 보급한다는데 그보다 우리 방언, 사투리를 잘 보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방 방송들이 일정한 시간에 자기네 지역 방언으로 하게끔 하자거나 뉴스는 표준말로 하더라도 드라마나 생활 교양 프로그램은 하루에 2시간이라도 방언으로 해야 사투리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제안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더라.

언론인 출신으로서 지금의 언론 현실을 어떻게 보나?

나는 한국의 모든 언론이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당파성에 있다고 본다. 언론의 당파성이라는 것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그 프레임 안에 독자를 가둬놓은 거다. 언론은 당파성 프레임의 정상에서 권력화되어 간다. 프레임은 바로 도그마를 동반한다. 가령 A라는 신문은 A라는 언론사의 기관지, B라는 신문은 B라는 언론사의 기관지로서 자기 당파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자기 당파성을 ‘정의’라 말한다. 기막힌 일이지. 다른 당파성이 완전 부정되는 거다. 그걸 정의라고 말하기 때문에 언어가 소통이 안 된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많이 말하고 많이 발행할수록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 된다.

그 단절을 피하려면?

그런 프레임 안에서 기자들은 자기 의견을 사실이라고 말한다.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의견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쓰는 거지. 그렇게 하면 아무 소통이 안 되고, 사회는 점점 고립된다. 기자들은 그런 당파성의 언어나 신념의 언어를 버려야 한다. 이제는 과학의 언어, 사실의 언어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레임 안에서만 권력을 누리고 먹고사는 거지. 이것은 하루이틀 사이에 고치기 어려운 일이다. 이미 프레임이 굳어져버렸다. 세계를 바라보는 프레임 위에 권력과 언론이 공존하고 있다.

현역 기자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실을 가지고 정보 수집을 하는 훈련.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 기자들 보면 다들 사상가 행세를 한다. 사상가나 이념가 행세하는 기자들이 있고, 또 멋있는 문장을 쓰는 게 기자인 줄 아는 이들이 있다. 이게 무슨 기자냐. 기자는 스파이다. 남 염탐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자라고. 대학을 갓 졸업해 입사한 기자 초년생이 지도자인 척하고 언론을 통해 사회를 계도하겠다는 생각부터 버리고 정보 수집 훈련부터 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현장을 가봤나?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가고 단원고에도 갔다. 안산 분향소에 가봤더니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돌아가신 선생님한테 편지를 써놨더라. ‘투표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셔서 우리가 투표하고 왔다’라며 지난해 총선 때 처음 투표하고 온 날 거기다 써놨더라. 편지 수천 통이 쌓였는데 다 읽어나가다 보니 그런 편지가 있더라. 희망의 싹이 있구나 하는 일말의 위로를 받았다.

촛불집회에 나가봤나?

촛불과 태극기 집회 양쪽 다 가봤다. 촛불은 수습이 잘된 거다. 왜냐하면 시민 에너지가 모인 거대한 촛불은 뒷마무리를 혁명이 아닌 방법으로 했다. 헌법 틀 안에서 사법과 헌법을 존중하면서 다시 평화로운 대선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정말 훌륭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힘이고 그걸 바탕으로 화합할 수 있어야 한다. 헌법과 사법기능, 그것이 우리 공동체 바탕임을 보여줘서 잘된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서는 뭘 느꼈나?

1960년대 개발독재 시대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의 인생들을 봤다. 나처럼 유년시절 보낸 이들이 겁이 나는 거다. 지금 누리는 게 아까운 거야. 잃으면 어떻게 하나. 태극기에 보수 정치가 올라탔잖아. 망한 거다. 지난겨울 집회 때 김진태 의원 같은 사람이 보이더라. 그가 태극기를 둘렀는데 두꺼운 안감을 넣었더라. 태극기를 두루마기처럼 입고 왔더라. 따뜻하게.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태극기 집회는 정치인이 올라타서 똥통에 빠진 거다. 오판이고 궤멸이다.

앞으로도 소설을 계속 쓸 건가?

딱 장편소설 3개만 쓰고 가려고. 뭘 쓸지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지만 3개만 쓰면 내 생이 끝날 거 같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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