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을 인터뷰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간 게 1994년 7월이었으니 23년 전이다. 원 〈시사저널〉의 자매 회사인 예음문화재단에서 그해 9월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윤이상 음악축제’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므로 단독으로 윤이상을 만날 수 있었다. 나로선 원 〈시사저널〉 자매지인 〈객석〉 창간호(1984년) 특집으로 한번 다루었기에 오래 알고 지낸 듯한 인물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니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구나, 〈광장〉의 서문을 쓰던 최인훈처럼 자못 흥분되었다.

윤이상 인터뷰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원 〈시사저널〉 제249호.

독일인으로 귀화한 윤이상의 주 거주지는 베를린이었으나 신병 치료와 휴식차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가족이 거처하는 숙소로 찾아가 전주 부채 등 준비해간 기념품들을 건네고, 그의 생일에 맞추어 9월8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음악제의 일정을 알려주었다. “남한에서 온 기자와 정식으로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반가워하는 그에게 “커버스토리로 게재할 기사이므로 3회 정도 만나 인터뷰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본인은 그러려니 하는데, 동석한 부인 이수자씨와 딸 윤정씨의 기색이 좋지 않았다(그때는 한 번도 화사하게 웃어주거나 환영해주지 않고 경직되어 보이던 모녀가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윤이상의 건강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내가 루이제 린저의 윤이상 평전 등은 이미 다 읽고 왔노라 말하자 윤이상은 “루이제 린저도 그렇고, 여기자들이 이해력이 빠르고 글을 잘 쓴다”라며 웃어 보였다. 

나는 배석자가 없는 가운데 인터뷰하고 싶었으나 모녀는 우리 두 사람만 남겨놓는 법이 없었다. 단둘만의 시간이 허락된 것은 마지막 날. 이틀간의 인터뷰가 끝나고 사흘째 되던 날에는 야외에서 사진 촬영을 하기로 했다. 이날은 모녀가 동행하지 않았다. 그가 “파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며 사진기자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파리 북서쪽 외곽의 불로뉴 숲.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그린 곳이다. 숲으로 들어서자 실내에 머물며 인터뷰할 때보다 유쾌해 보였다. 북한 체제를 흉보며 뒷담화를 한 것도 이날이었다.

그는 남한 기자가 출장 와서 사흘간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흐뭇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윤이상은 “〈시사저널〉에서는 1년에 기사를 몇 건이나 쓰느냐”라고 물었다. 내가 “주간지니까 50회 발행하고 매호 한 건 이상, 일간지와 다른 방식으로 심층적인 기사를 써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그가 갑자기 북한의 잡지 기자들과 비교하며 그들을 흉보기 시작했다. “윤이상음악연구소(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1984년 설립되어 해마다 윤이상음악제를 열고 있다)에서도 음악 잡지를 내는데, 도무지 일하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잡지가 나와야 할 때 제대로 나오는 적이 없고 기사도 충실치 않다는 것이다. “하루는 내가 담당 기자를 불러, 당신 도대체 1년에 기사 몇 건이나 씁니까 하고 추궁했더니 8건 쓴다고 합디다. 슬슬 놀아도 직장 잃을 염려가 없다 이거지요. 북한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요”라고 해서 둘이 한바탕 웃은 기억이 난다.

ⓒ통일뉴스1987년 10월 방북한 윤이상 선생(왼쪽)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와 나눈 이야기의 8할은 음악에 관한 내용이었다. 원 〈시사저널〉의 자매 회사인 예음문화재단이 야심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행사를 앞두고 하는 인터뷰인 데다, 당시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지휘 아래 38년 만의 고향 방문을 성사시키려는 분위기였으니 공격적인 인터뷰는 자제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특종 하나는 건져가야겠다는 욕심을 누르기가 힘이 들었다. 김일성 조문 문구, 범민련 활동 등 친북 행위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고 대신 대답을 하려 했다. 그가 제지하면서 “범민련 의장직은 그만둔 지 벌써 1년 됐다”라며 유연하게 해명을 하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자신을 통일운동가로 지칭했다.

3일간의 대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파리에 오면 베를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유를 느낀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하여 인터뷰 기사의 서두로 인용하기도 했다. 통영이 그의 생물학적 고향이라면 베를린은 사회적 고향이다.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를 구해낸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베를린의 정치가들과 음악가들이었다. 그에게 38년간의 안식을 허락한 베를린이 진정한 자유를 주지는 못했노라 고백한 것이다. “베를린에 있으면 내가 그 사회의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라는 망명객의 술회가 잊히지 않는다. 그가 파리에서 느낀다는 자유가 어떤 것일지 단박에 이해되었다. 아무것도 빚진 게 없는 곳, 갚아야 할 은혜나 부채가 없는 곳, 주목받지 않을 수 있는 곳.

23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말을 하게 되다니…

우리가 만난 날은 김일성이 사망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그에게 자유를 느끼게 하는 진정한 이유는 김일성의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김일성을 존경하고, 심지어 사랑했다고 나는 느꼈다. 하지만 피 말리는 삼각관계의 사랑, 대가를 치러야 하는 금지된 사랑이었다. 힘겨운 사랑을 종결시킨 연인의 자유라 할까? 김일성의 죽음은 비로소 그에게 자유를 허락했고 조국에 묻히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이전 정부에서 여러 차례 그를 불러들여 음악제를 열고 싶어 했지만 오지 않았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진해서 귀국하고 싶다고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정황은 그런 것이다.

2017년 9월17일은 그가 태어난 지 100년 되는 날. 부부는 멋진 생일 선물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띄웠고, 이수자씨는 통영에서 열린 기념음악회 ‘해피버스데이 윤이상’에 참석해 꽃다발을 받았다.

ⓒ연합뉴스지난 7월5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오른쪽 두 번째)는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윤이상 선생의 묘소를 찾아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를 심었다.

알려진 바와 달리,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것은 사실 그의 선택이었다. 그와 3일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불로뉴 숲에서 헤어지면서 우리는 “두 달 후 서울에서 만나자”라며 악수했다. 그도 나도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우리는 두 달 후에 서울에서 재회하지 못했다. 이듬해 11월에 베를린에서 그가 사망했으니 이승에서의 재회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가 당시 서울에 오지 못하게 된 과정을 나는 원 〈시사저널〉에 상세히 보도한 바 있다. 한국 정부가 신변보호 등을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최종적으로 “가지 않겠다”라고 통보한 사람은 윤이상 본인이다. 그토록 가고 싶은 고향이지만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가지는 않겠다는 것이 그와 가족의 결론이었다. 나는 일전에 이 문제를 두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보았다. “선산도 찾아보고 음악제도 즐기다 가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는 내 의견이었고 “안 들어오기 잘했다. 눈치 보며 며칠 머물다 가면 뭐하냐”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를 나무랐다. 왜 그렇게 감상적이냐고.

윤이상에 관한 한 나는 감상적이다. 그와 3일간 10시간 이상을 함께하면서 남도 사내 윤이상의 수구초심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유난하던 것도 생각난다. 젊은 나는 노인들이 으레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당시 77세의 고령이라지만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안색도 좋아 보였고 정신이 명료했기 때문이다. 가족 걱정도 유난했다. 10년 연하의 아내와 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나의 귀국이, 뒤에 남겨질 가족에게도 좋은 일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사과 권고를 받아들여 유족에게 유감과 위로를 보냈다. 이후 고인의 가족이 자유롭게 평양과 통영을 왕래하는 모습을 보면 매듭 하나는 풀린 것 같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온도가 다르다. 윤이상재단의 일이 그렇고, 통영의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윤이상기념관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지원이 또한 그렇다. 앞으로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윤이상은 또다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배제의 대상이 될 것인가.

ⓒ연합뉴스2007년 9월13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고 윤이상 선생 부인 이수자 여사(왼쪽)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23년 전 기사는 ‘당신이 좌파든 우파든,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금세기 한 위대한 작곡가로서 그의 음악을 즐겨보시라’는 요지였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말을 하게 되다니…. “정부에서 좀 유화적으로 나올 때면 전화가 쇄도하다가도 다시 정부가 냉담해지면 썰물처럼 적막해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라던 그이의 음성이 생생하다.


김현숙
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입사하여 문화부 팀장으로서 1994년 윤이상을 인터뷰했다. 인민군 출신의 포로이며 중립국을 선택했던 주영복 소좌 발굴 기사로 특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케이무비러브 (Kmovielove.com) 대표로, 주한 외국인 영화감독들과 국제이방인영화제(KIXFF.com)를 열고 있으며, 매주 수요일 광화문 ‘전성기캠퍼스’(서울 종로구 삼봉로 48)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화 상영회(02-6333-1900)도 연다.


기자명 김현숙 기자(1989~1999 재직)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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