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청년 크리스티안 크라이저 씨는 청년 기민당(집권 기민당 청년조직이다) 국제관계 담당자다. 그는 한국에서도 종종 보던, 자신감 넘치는 청년 보수 정치인의 느낌을 풍겼다. 그래서 기자의 질문에 돌아온 답은 더 뜻밖이었다. “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노조를 싫어하는 정서가 있다. 노조 때문에 청년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는 어떤가?” 그는 처음에 질문의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어 번 통역이 더 오가고 나서야, 크라이저 씨는 별 질문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독일은 다르다. 젊은 사람들도 노조에 많이 가입한다. 특정한 노조의 파업 방식 등에 대해 비판적인 경우는 있지만, 내 친구나 주변을 봐도 그렇고 독일 전체 분위기도 그렇고 노조에 굉장히 긍정적이다.” 독일 사회가 노조를 대하는 태도가 한국과 다르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았다. 하지만 집권 보수당의 청년 정치인이 노조를 ‘굉장히 긍정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설명하는 풍경은 역시 낯설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은 독일 시스템의 부가요소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구성요소였다. 정부·정당·기업 등과 같은 반열로 간주되며, 이 요소들이 한데 모여 국가를 구성한다. 국가가 먼저 생기고, 그 국가로부터 정당과 시장이 파생하다시피 했던 한국과는 사회의 형성 궤적이 달랐다.

독일 금속노조(IG Metall)는 독일 최대 조합원을 자랑하는 산별노조다. 독일노동조합연합(DGB) 소속이지만 독일은 산별노조 중심 체제여서 실질적인 권한과 자산은 단연 금속노조에 집중되어 있다. 금속·전자·전기·철강·자동차·섬유·의류 등 독일의 주력 수출 제조업이 금속노조의 영역이다. 콘라드 클링엔부르크 씨는 금속노조의 대외협력 담당자로, 연방의회와의 협상 등을 맡고 있다. “기민당이나 사민당을 만나면 이런 인사말을 꼭 한다. ‘우리 조합원은 224만명으로, 양대 정당 당원을 합친 숫자보다 많다’고(웃음).” 금속노조는 지역지부만 15만5000개에 달하는 강한 조직력을 자랑한다.

독일 사민당은 150년 역사를 지닌,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서 깊은 정당이다. 이 사민당 150년사를 금속노조를 빼놓고는 얘기하기 어렵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금속노조는 노동사뿐만 아니라 정치학 교과서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조직이다. 금속노조가 사실상 사민당이고 사민당이 곧 금속노조라고 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다”라고 말했다.

ⓒAP Photo2004년 8월 라이프치히 시 시민들이 사민당 정권의 복지 축소에 항의하며 시위하고 있다.

클링엔부르크 씨는 “금속노조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노조는 정치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라고 말한 뒤에 씩 웃었다. “물론 금속노조가 사민당과 관계가 밀접한 것은 비밀이 아니다. 마틴 슐츠(사민당 총리 후보)의 연설을 조합원 밀집 지역에서 열게 해줬다. 사민당의 패배가 유력해 보이는데, 그러면 빌리 브란트 하우스(사민당 당사)에서도 우리가 적극 지지하지 않아서 졌다고 책임을 물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정치로부터 독립이 원칙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 몸으로 움직이던 시절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

덩치 커진 독일 노동조합은 체제의 수호자

노조가 시스템 자체의 구성요소로 단단히 결합되면, 역으로 노조가 시스템의 수호자가 된다. 총선 결과가 나오기 사흘 전인 9월21일, DGB 국제협력 담당 부서장 프랑크 자흐 씨는 “노조 없는 민주주의도, 민주주의 없는 노조도 상상할 수 없다. 독일이 나치 시대를 거치며 배운 역사의 교훈이다”라고 말했다. 연정 협상 테이블이 펼쳐지면 노조의 요구 사항이 각 정당을 통해 테이블로 올라간다. DGB는 기성 양대 정당의 대연정을 선호하고(사민당은 선거 패배 직후 대연정은 없다고 선언했다), AfD(독일을 위한 대안)와 같은 극단주의 정당을 골칫거리로 여긴다.

집권 기민당은 보수 정당이니 아무래도 껄끄럽지 않을까? 자흐 씨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답했다. “기민당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독일의 정당체제에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 메르켈 총리도 노조와의 대화에 열린 사람이다. 노조 탄압 이슈가 있는 나라와 정상회담이 잡히면 총리에게 그 이슈를 발언해달라고 요구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왔을 때도 요구했다. 실제로 총리가 상대 정상에게 전달도 한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요구를 노조가 하기도 한다. DGB와 금속노조는 이번 연정 협상에서 최대 관심사로 “기업의 단결을 강제해달라”를 꼽았다. 한국으로 치면 전경련이나 경총을 강제 조직으로 만들어달라고 노조가 정부에 요구하는 셈이다. 독일의 산별노조 체제가 지속 가능하려면, 기업들도 산업 단위로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산별 협상이 가능하다. 최근 들어 개별 협상을 선호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산별 협약의 신뢰성이 흔들리고 있다. DGB와 금속노조의 요구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한국의 경영계나 보수 언론은 한국 노조의 ‘비타협적·전투적 태도’를 즐겨 비난한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오히려 노조의 단위와 덩치를 키우고 체제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는 해법을 제시할 법도 하다. 노조의 덩치가 커지고 사회 속에 포괄적으로 결합할수록, 노조의 전투성은 완화되고 체제 수호자의 성격은 강화된다는 사실을 독일 사회가 보여준다.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집권기(1998~2005년)는 사민당과 노조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뒤틀린 시기다. 당시 슈뢰더 총리는 연금개혁, 실업보험 수급자격 강화, 파트타임 노동 도입 등 복지 축소와 시장화를 골자로 하는 ‘어젠다 2010’을 추진했다. 한국에 잘 알려진 하르츠 개혁도 큰 틀에서 이에 포함된다. 이 개혁은 독일의 장기 호황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노조는 냉소적이다.

 

ⓒ연합뉴스9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방한 중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왼쪽)를 만나 환담하고 있다.

최근 슈뢰더 전 총리가 한국을 찾아 “과감한 개혁이 결국 옳은 결과를 냈다”라는 인터뷰를 한 직후였다. 이를 기자에게 전해들은 금속노조의 클링엔부르크 씨는 “늙은이들은 꼭 그렇게 자기중심적이다”라고 말했다. “슈뢰더가 남긴 상처 때문에 AfD와 같은 극단주의가 독일에 생겼다. 언제든지 빈민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극단주의가 지지를 받는다.”

노조와 사민당의 결별은 극적일 정도다. 슈뢰더가 집권한 1998년 총선에서 DGB 조합원들은 59.9%가 사민당에 투표했다. 하지만 하르츠 개혁과 ‘어젠다 2010’의 결과가 독일 사회에 퍼진 2009년 총선에서, DGB 조합원들은 36%만 사민당에 투표했다. 무려 23.9%포인트나 빠져나가는 대폭락이 11년 만에 일어났다(DGB 자료). 이제 생산직 노동자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 AfD의 최대 표밭으로 떠오르고 있다. 출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번 총선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은 기민·기사당 연합 25%, 사민당 23%, AfD 21% 순서로 투표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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