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이 사라졌다. 세 살 때였다. 잘 놀고 잘 자고 잘 떠들던 막내아들이 하루아침에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다른 아이가 나타났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밤새 한숨도 자지 않으면서 종일 뜻 모를 말만 웅얼대는 낯선 아이가, 오웬의 얼굴을 하고서 오웬의 옷을 입은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쩔쩔매는 부모에게 의사가 말했다. “발달 장애입니다. 흔히 ‘자폐증’이라고 부르죠.”

1년이 흘렀다. 오웬이지만 오웬이 아닌 아이가 그날도 여느 때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빤히 쳐다보며 혼자 중얼댔다. “주서보스, 주서보스….” 주스를 달라는 말인가 싶어 얼른 엄마가 가져온 잔도 밀쳐내며 계속 중얼댔다. “주서보스, 주서보스….”

인간이 되길 원하는 인어공주에게 대가를 내놓으라며 노래하는 마녀. “별거 아냐. 네 목소리만 줘.” 그 장면 하나를 몇 번이고 돌려보는 아이 옆에서 이윽고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여보, 주스가 아니야. 저스트야!” ‘Just your voice(네 목소리만 줘)’를 ‘주서보스’로 따라 읽은 것이다. 꼬박 1년 만에 처음으로 온전한 문장을 내뱉은 아이는 그 순간, 오웬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돌아왔다.

의사 생각은 달랐다.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건 자폐 아동의 흔한 행동일 뿐이라고 했다. 의사 말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믿게 되었다. ‘주서보스’를 내뱉은 날 이후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웬은 또 사라졌다. 오웬이지만 오웬이 아닌 낯선 아이가 다시 뜻 모를 말을 웅얼댔다.

4년이 더 흐른 어느 날. 큰아들
월트의 아홉 번째 생일날. 파티가 끝나고 친구들이 돌아간 뒤 잠시 울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날 오후. 별안간 오웬이 말했다. “형은 어른이 되기 싫은 것 같아. 모글리나 피터팬처럼.”

그러고는 후다닥 뛰쳐나갔다며, 20년 전 그날을 회고하는 아빠 표정이 20년 전 그날처럼 잔뜩 상기된다. “여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이 꿈만 같은지 20년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재연하는 엄마가 목이 멘다. 이제 어른이 된 오웬은 부모와 달리 연신 방실방실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면서. 수준 높은 문장으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디즈니가 만들지 않은 최고의 디즈니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을 소개하는 지금, 내 가슴은 다시 또 벅차오른다. 고작 초반 15분 정도의 내용만 복기하며 여기까지 썼을 뿐인데 벌써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세상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 아이가 남몰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대사를 통째로 외운 기적 같은 이야기, 그때부터 세상의 언어 대신 오웬의 언어로 서로 마음을 나눈 가족의 가슴 뭉클한 기록, 마침내 홀로 설 준비를 하는 오웬이 조금씩 세상의 언어를 배워가는 후반부까지.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모든 대화가 소중하며 모든 연출이 세련됐다. “디즈니가 만들지 않은 최고의 디즈니 영화”라는 평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모든 관객이 위안을 얻겠지만 이 영화가 더욱 각별할 관객은 아마도 그분들. 차가운 삿대질 앞에서 무릎 꿇어야 했던 부모들. 장애를 ‘혼자 짊어진’ 현실의 어깨가, 장애를 ‘함께 껴안는’ 영화 속 품에 안겨 마음껏 눈물 쏟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렇게 한 줌 응어리라도 덜어낸 뒤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오웬을 더 힘껏 껴안는 밤의 무게를 감히 헤아려본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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