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이 거의 망해가던 1908년, 만주의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학교라는 이름의 학교가 세워진다. 1925년 폐교까지 17년 동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 할 영화감독 나운규를 비롯해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지. 이 학교의 설립자는 김약연이라는 분이었는데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들을 확보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어. “자기는 조밥을 먹었지만 교사들을 위해서는 40리(약 15㎞)나 떨어진 용정까지 사람을 보내 쌀을 사왔고 쌀은 늘 떨어뜨리지 않았다. 교사들은 송구스러워했으나 김약연은 그때마다 그 정신을 2세에게 바치라고 했다(〈중앙일보〉 1972년 10월20일자)”고 할 정도였으니까 어느 정도 정성이었는지 짐작하겠지?

어느 날 명동학교에 평안도 청년 최세평이 나타나. 워낙 몸이 날래고 총명했던 그는 명동학교에서 체육과 수학을 가르치게 됐어. 새끼줄을 감아 만든 공으로 축구를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던 최세평 교사에게 난처한 문제가 생긴다. 마을의 한 처녀와 사귀게 됐는데 그 성이 최씨였던 거야. 즉 동성(同姓)이었지.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同姓同本) 남녀의 결혼이 법적으로 가능해진 게 자그마치 21세기였으니 1920년대 조선인들에게는 최씨끼리의 연애란 ‘불륜’ 비슷한 일이었어.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어찌 최씨가 최씨한테….” 동네 어른들이 출동하고 “최 선생 나오기요!” 대충 이런 분위기가 되자 그는 갑자기 뜻밖의 고백을 해. “제 이름은 최세평이 아니라 김홍일입니다.” 그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이 활약하던 오산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지. 경찰을 때려눕히고 망명길에 올라 중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뒤 독립군에 투신하여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바로 그 김홍일이었어.

ⓒ국가보훈처 제공김홍일 장군(1898~1980)은 한국전쟁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막았다.

일본 헌병대가 감시의 손길을 뻗쳐오자 김홍일은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고 중국 국민혁명군, 즉 장차 중화민국 정규군이 될 중국국민당 군대에 투신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파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제일차적인 과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인 스스로의 군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느꼈다. 그제야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내가 장차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확실히 깨달은 셈이다.” 한국인 스스로의 군비를 마련하고 일본을 타격하기 위해 그는 중국군이 된 거야.

중국군 소속으로 숱한 전투를 치르고 계급도 올라간 그는 1931년 무렵에는 상하이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어. 병기창은 각 군부대에 지급될 무기를 지급하는 곳이야. 즉 총이나 폭탄 같은 걸 수시로 다루고 빼낼 수 있는 부서의 책임자였다는 뜻이지.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일제 관헌이나 일본군을 직접 타격하려던 백범 김구에게 중국군 병기창 장교 ‘왕웅(王雄:김홍일의 중국식 가명)’이란 그야말로 어둠 속의 촛불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어.

일본 왕에게 던져진 이봉창의 수류탄 역시 왕웅의 병기창에서 나왔어. 이봉창의 의거 실패를 두고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라고 쓴 중국 신문에 이를 박박 갈던 일본은 상하이에서 일어난 일본인 살해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압박했고 급기야 1932년 1월28일 중국군을 공격하기에 이르지(1차 상하이 사변). 김구는 중국군 병기창 주임 왕웅, 즉 김홍일과 함께 일본군 격납고와 함정을 폭파하기 위한 공작을 꾸미지만 중국이 쉽사리 저항을 포기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 기세가 오른 일본은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식을 열기로 했지. 이렇게 얘기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을 거야. 바로 윤봉길 의사 의거지.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 폭탄과 던지지 못한 물통 폭탄도 김홍일의 작품이었어.

이후 김홍일은 중국군에서 장성(將星)까지 진급해. 그는 이제 때가 왔다는 백범 김구의 말에 거침없이 중국 군문을 박차고 광복군에 합류한다. 임시정부와 미국 전략 사무국(OSS)이 기획했던 국내 진공작전의 책임자로서 수도 서울 진격을 꿈꿨지만 핵폭탄을 얻어맞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 폭탄 만들어

그는 귀국해서 한국군에 입대하고 곧 장군이 돼. 엉성한 독립군의 일원으로 외국 군 장성을 지낸 군인이 나이 쉰이 돼서야 제자리를 찾은 거지. 한국전쟁은 또 한 번 그를 시련으로 몰아넣었어. 전쟁이 터지고 사흘 만에 서울이 무너져 내렸을 때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밧줄 위의 달걀 신세였어. 대통령은 변장하고 목포까지 가서 부산으로 배를 타고 도망가고 참모총장이란 이는 병력의 50%가 한강 이북에서 전투 중일 때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만행을 부렸지. 미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전열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전 국토가 넘어갈 판이었어. 그때 기적처럼 나타난 이가 김홍일 소장이었어. 연대 단위를 지휘해본 경험자도 드물었던 한국군에서 김홍일은 대규모 부대를 운용해본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는 경기도 시흥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절체절명의 임무를 맡게 돼.

“…김홍일 소장이 자기 책임 아래 부서진 군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가장 멋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김 장군은 미소로 그어지는 잔주름과 반백의 머리칼로 인해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김 장군은 그때 패전 시기에 만난 모든 군인들, 바로 그 불길한 수요일 보병학교 연병장으로 끌려온 군인들을 일일이 만나보고 격려했다. …바로 그 우울한 날 김 장군이 보여준 것같이 군사적 패주 속에서 즉각 재편성하는 역량과 지도력을 보여준 장군들이 군 역사에 얼마나 많은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이승만 박사와 미국 대사관(Embassy at War)〉 중, 해롤드 노블, 1982, 정호출판사).”

중국에서 만주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던 김홍일은 거의 전력이 붕괴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미소로 병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어. 애초 미군의 요구는 사흘만 버텨달라는 거였어. 그 전에 한국군이 무너진다면 미군은 부산에 상륙했다 해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선언과 함께. 김홍일 장군과 허약하기 그지없던 한국군은 무려 일주일이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어. 김홍일 장군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도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을 거야.

그의 일생을 보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보여. 이승훈에게 감화받은 오산학교 졸업생이 만주로 가 독립군이 됐다가 중국 군대의 장성까지 올라갔고,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만들어서 “100만 대군이 못할 일(장제스의 표현)”을 해내기도 했으며, 광복군 참모장이 됐다가 해방 이후에는 다시 중국군에 돌아가 한국인들의 순조로운 귀국을 위해 노력했고, 어렵게 귀국해서는 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동료가 돼 국군을 건설하고 북한 인민군과 사생결단을 벌이기까지 한 기구하고도 사연 많은 군인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국가보훈처 제공2016년 9월23일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이 김홍일 장군 36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후묵념을하고있다.

그가 중장으로 예편하고 중화민국 대사로 나가게 됐을 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렇게 그를 치하해.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5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5성 장군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빠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매우 싫어하지만 최소한 김홍일 장군에 대한 평가만은 기꺼이 동의해. 그분은 대한민국의 5성 장군, ‘원수(元帥)’에 걸맞은 사람이었어.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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