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이용마 기자는 아내를 이름으로 불렀다. 벨을 누르기도 전, 김수영씨가 기다렸다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 기자는 서재에 있었다. 최근엔 종일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고 했다. 식탁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차를 따라주었다. 희미하게 인삼 향이 났다. 현관문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현재와 경재가 번갈아 모습을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 아들이다. 집에만 있어 사람이 오면 반갑다는 김씨는 사진기자에게 아이들과 아빠의 웃는 모습을 담아달라고 부탁했다.

기자에서 취재원으로 자리가 바뀐 지 5년이다. 1996년 MBC에 입사한 이용마 기자는 정치·경제·사회·문화부를 두루 거쳤다. 삼성의 불법 상속 문제를 보도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함락된 수도 카불을 누비기도 했다. 그는 MBC 노조가 공정방송 사수를 걸고 싸우던 2012년 3월 해고되었다. 당시 노조 홍보국장이었다. 이후 〈한국 사회 계층균열의 등장과 정당 재편성〉이라는 박사 논문을 썼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 복막암 판정을 받은 뒤, 1년 새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사람들은 무엇이 그의 병을 키웠는지 짐작하며 그의 앞에서 혹은 뒤에서 눈물을 훔쳤다. 공영방송의 몰락을 다룬 영화 〈공범자들〉에도 이 기자가 나온다. 그도 아내와 극장을 찾았다. 수술을 거부하고 전북 진안에서 요양하던 그가 두 달 전, 집으로 왔다. 8월30일 그의 성남시 분당구 자택을 찾았다. 만남이 있던 시각, MBC 노조는 파업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그가 참여했던 170일 파업 이후 5년 만이었다.
 

ⓒ시사IN 신선영이용마 MBC 해직 기자는 “공영방송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정치권이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라며 사장 선발 방식으로 국민대리인단 제도를 제안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공기가 좋은데, 좀 춥다.

골짜기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되게 춥다. 뒤가 청계산이다.

이사 오기 전엔 서울 어디에서 살았나?

잠원동에 살았다. 공기 좋은 곳을 찾아 1월에 왔다. 내가 시골에 있을 때 집사람이 찾아 이사했다.

가족과 같이 지내니 어떤가?

아무래도 마음 편하고 좋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 아직도 등산을 하나?

기력이 떨어져 그렇게까지 못하고 산책도 안 하다 한 지 사흘 됐다. 여기 와서는 복수가 차올라 관을 꽂고 살았다. 두 달 가까이 되니까 관이 새서 뺐다. 꽂고 있으면 밖을 돌아다니기도 어렵고 운동을 못하는데, 그러니 더 기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복수가 차 다시 꽂아야 할 것 같다.

처음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이제 언로가 트였다. 예전엔 어디에 한마디만 인용되더라도 인터뷰했다고 몇 달 정직을 해버려 사람들이 말을 못했다. 지금은 봇물 터지는 시기다. 그간 온갖 억울함과 수모를 당했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내 사연 말고 그들을 다루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공범자들〉에서 이용마 기자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울컥했다. 영화를 어떻게 봤나?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되게 힘들었다. 사실 그날 상영 시간이 늦어 버티기가 힘들었는데 무리해서 봤다. 봤던 이유 중 하나가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이 영화를 보면 굉장히 감동적이라고, 그걸 보면 엔도르핀보다 더 몸에 좋은 다이도르핀이라는 게 나온다고 했다(웃음). 한번 보자 했는데 사실은 되게 힘들었다. 우리한테는 정말 아픈 시간들이었다. 굉장히 아픈 시간을 담담하게 담아냈더라. 주변에서 내게 MBC 파업과 관련해 글을 써보라고 하는데 못 쓰고 있다. 못 쓸 것 같다. 너무 힘든 시간들이라.

애초 2012년 왜 노조 집행부에 합류했나. 전망이 좋지 않았는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똑같은 질문을 최승호 선배가 〈공범자들〉 찍으며 계속 묻더라. 남들 다 안 간다고 할 때였다. 가면 파업을 할 수밖에 없고 복수의 해고자가 나오리라는 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안 가려고 했던 건데 최승호 선배가 나한테 자꾸 안 가면 안 됐냐고 집요하게 묻더라.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아서인 건데. 한 번도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간 MBC에서 생활하며 많은 혜택을 입었는데 어려운 시기를 피해서 간다는 게 스스로 납득이 안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다. 가겠다고 마음먹고 보면 편해진다(웃음). 해고당했을 때도 덤덤했다.

동기인 김민식 PD가 시사회에서 오열하며 자신이 파업을 접자고 했다며 미안해했다.

민식이가 팩트를 약간 오해하고 있다. 접을 때는 내가 앞장서서 접자고 했는데(웃음). 나는 겉으로는 강경파지만 꽤 실속을 챙기는 사람이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앞만 보고 머리 들이미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은 파업을 가장 빨리 끝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나였다. 민식이는 모를 거다. 접을 때가 아니라 파업에 들어갈 때 무척 힘들었다. 나는 굉장한 강경파였다. 회사가 계속 약속을 어기고 그 와중에 시사교양국이나 라디오국은 거의 파업 분위기였다. 내버려두면 자기들끼리 제작 거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보도국이 끓어오르질 않았다. 어떻게 보면 공영방송의 핵심 부문인데 보도국이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파업을 시작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접을 때는 위원장과 많이 부딪쳤다. 난 회사랑 협상해야 한다고 했고 위원장은 지금 접으면 조합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다 170일까지 간 거다.

김민식 PD가 페이스북으로 ‘김장겸은 물러나라’ 하고 외치는 라이브 방송을 했다.

그러고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찾아왔다. 일은 저질렀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더라. 두 마디 해줬다. 네가 아무리 난리를 피워도 김장겸이 너 절대 해고 못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 크게 떠들어라(웃음).

지난 10년을 두고 ‘청춘을 잃었지만 기록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물론 이기면 좋다. 이기지 못해도 일단 싸웠다는 기록을 남겼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게 중요한 거다. 그래야 다음에 이런 상황이 또 발생하면 나가서 싸울 수 있다.

〈공범자들〉에 안 나왔지만 기억해야 할 공범자들은 없나?

많다. 거기 나온 사람들은 역대 사장들이고 그 아래에서 더 극렬하게 뛰었던 사람들이 많다. 사장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2012년 파업할 때 김장겸이 정치부장이었다. 기사를 편향적으로 만들어놓은 게 그다. 그런데 하급 간부라 눈에 안 띄었다. 그가 원흉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시사IN 신선영지난해 복막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이용마 기자(맨 왼쪽)가 가족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현진·신동호 아나운서가 인지도 때문인지 주목받고 있다.

아나운서국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굉장히 클 거다. 배현진씨 같은 경우 집회에 참여하자고 연락하면 다쳤다는 둥 핑계를 대고 거짓말을 자주 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다 난데없이 이상한 글을 올리고 복귀하겠다고 했다. 선배들이 집에까지 찾아갔다고 들었다. 함께하자고. 기대를 했던 동료들 입장에서 얼마나 배신감이 크겠나. 신동호 국장도 아나운서 국장을 몇 년째 하고 있는지.

후배들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미안할 수밖에 없다. 2012년 파업에서 이겼다면 그렇게 안 됐을 텐데. 결과적으로 이기질 못했잖나. 그러다 보니 내 인생도 내 인생이지만 후배들 인생도 몽땅 꼬였고 우리가 청춘을 잃어버렸다.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희망이 보였던 시기도 있었나?

재판에서 선고를 받으면서 기분이 좋았다. 노조에 걸린 소송이 총 6건인데 큰 건이 3개다. 195억원 손해배상과 업무방해 혐의 건, 해고무효 소송까지. 그나마 합리적인 판사들을 만나 재판을 다 이겼다. 그만큼 회사가 완전히 무도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법원 판결만 남아 있다.

해직자 문제는 신경 끄고 공영방송의 정상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해직자 문제는 정치권에서 생색내기 제일 좋은 이슈다. 복직만 시켜주고 모든 게 끝났다고 할 수도 있다. 야당도 공영방송을 정상화하자면 거품 물고 반대하더라도, 특별법 만들어 해직자들을 복직시키자고 하면 크게 반대하지 않을 거다. 특별법 말고 대법원 판결을 통해 복직해야 한다. 확정판결을 받으면 공정방송을 위해 파업한 게 합법이란 의미다.

기자 이용마에 대해 얘기해보자. 원래 기자가 되려 했던 건 아니라고 들었다.

원래 행시(행정고시)를 보려고 정치학과에 갔다. 1987년에 입학했다. 격동기니까 그 시기를 지나면서 관료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전두환에서 노태우 정부로 이어지던 시절이고 행시를 보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1~2학년 때까지는 과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3학년 때부터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몇 명이 모여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중에 책자를 냈는데 반응이 좋아 출판사에서 찍자는 제안도 왔다.

특히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워낙 많아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성남에 출입할 때다. 경찰기자를 하다가 말을 안 듣는다고 거기로 쫓겨났다. 1997년에는 KBS와 MBC가 시청률 경쟁으로 사건 사고 보도를 많이 했다. 우리가 볼 땐 신문 1단짜리인데 1분20초짜리로 만들라는 거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많으면 절반을 그걸로 채웠다. 시청자를 우롱하는 수준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황당한 리포트 중 하나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운전자가 슬리퍼를 신고 운전하다 사고가 났다. ‘슬리퍼 신고 운전 조심해야’ 이걸 리포트한 거다. 이런 식의 리포트가 무진장 많았다. 캡(선임기자)한테 전화해서 “이거 얘기 안 됩니다” 하면 욕부터 날아온다. 꼬치꼬치 캐묻는데 답변을 해줘야 한다. 만들라는 대로 만들면 쉬운데, ‘킬’시키려면 훨씬 더 많은 양을 취재해야 한다. 싸우다 결국 쫓겨났다.

왜 쫓겨난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나?

그때 좋은 기사를 많이 썼다. 그 전엔 조직에 얽매여 부품의 하나로 존재했는데 성남에 갔더니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템을 스스로 기획해야 했다. 의정부 검사와 조폭의 유착이라든지 법조 비리 기사를 비롯해 아파트 분양 원가를 공개하라는 기사도 썼다. 그건 언론사 중 최초가 아닐까 싶다. 기자들이 선호하는 출입처가 국회·법조·경제부다. 다 거쳐봤다.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스트레이트 기삿거리가 나와서 머리를 안 써도 된다. 기획해야 하는 자리에 가니까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기자 생활 중 황금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다.

 

 

 

 

ⓒ연합뉴스2015년 5월7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용마 기자 등(오른쪽 세 번째) 노조 간부들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주로 강한 권력을 비판해왔다.

그 당시 문화였을 거다. 그전에는 권력에 대해 비판을 못해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권력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워졌다. 우리가 경찰기자 할 때 선배들이 강조했던 게 “네가 서장 하나 잘라야지” 이런 거였다. 센 놈을 고발해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나도 그 물결을 탔던 거다.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파업하며 그런 반성이 많이 들더라. MBC가 100일 넘게 파업하는데 보도가 거의 안 나왔다. 쌍용차·한진중공업 노동자 등 많은 사람이 언론이 목소리 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홀했던 게 아닐까. 앞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쪽에 포인트 맞춰서 보도를 해보면 어떨까. 사실은 그렇게 해야만 거악도 바뀐다. 이재용 비판도 좋지만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왜 고통받는지, 반도체 산업을 추적해 들어가면 결국 미국에서 버린 사업을 받아다가 하는 부분까지 갈 수 있다. 그래야 뿌리를 캘 수 있다.

MBC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어땠나?

MBC에 있으면 어디 나가도 대우받고 인정받는다. 익히 알고 있었고 나와 보니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디서 일하는 누구라고 얘기하기가 어렵다. 애들 학교에서 아빠 직업을 써야 하는데 뭐라고 써야 하는지 묻더라. 해직 기자라고 쓸 수도 없고.

공영방송 정상화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2012년에는 기약 없는 싸움을 하면서 독려를 위해 주장했다면 이번엔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다. 찬바람 불기 전에 끝난다고 본다. 지금 방문진(방송문화진흥회)과 김장겸 체제를 일소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지배구조 개선까지 이뤄져야 한다.

대안으로 국민대리인단 제도를 제안했다.

현재의 공영방송 지배 체제가 만들어진 게 1987년이다. 6월항쟁 이후다. 이후로는 언론의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역사였다. 1987년도에 만들어진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다가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야 깨닫게 됐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노무현 정부만큼 언론의 자유를 누릴 환경은 만들어질 거다. 그렇지만 또 정권이 넘어가면 아픈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시민의 손으로 사장을 뽑자는 건가?

그렇다. 국민대리인단의 핵심은 정치권력이 공영방송에서 손을 떼는 거다. 지금은 여야가 추천한 사람들이 이사로서 사장을 임명한다. 그러다 보니 여야 몇 대 몇인가, 여기에 모든 게 달려 있다. 사장이 되려는 사람은 누가 집권할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정치권이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

투병 와중에도 끊임없이 MBC와 공영방송의 정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직장은 어떻게 보면 삶의 한 부분일 뿐 아닌가?

생사는 어차피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목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과 아무래도 연관이 된다. 대학에 다니면서 고시를 포기한 대신 꿈을 키웠다. 사마천의 천도시비(天道是非)론이라고 있는데, 2000년도 더 전에 사마천이 그 얘기를 한다. 백이와 숙제처럼 절개와 의리가 있는 사람은 고사리를 캐다가 굶어죽고, 도척과 같이 사람을 많이 죽인 산적은 부유하게 수명을 다한다고. 하늘의 도가 있느냐고. 그 대목을 읽으면서 딱 맞아떨어지더라.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3대가 빌어먹고 친일파는 3대가 떵떵거리고 산다. 너무 불합리하다는 걸 대학 다닐 때 뼈저리게 느끼면서 우리 사회에 처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를 바꿔보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MBC에 입사했던 것도 기자라고 하면 현실과 가까우면서도 지적인 관심을 놓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보니 불합리한 것들이 너무 많더라. 이런 현실을 바꿔줘야 내 아이들이라든지 후손들이 조금 더 나은 사회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죽어서 내세에 천국에 가거나 극락을 가는 게 아니라, 그렇게 안 돼도 좋으니까(웃음) 현실 사회에서 조금 더 정의가 세워진다면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 꿈의 연장선이었다. 그걸 위해 언론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끈을 못 놓는 거다. 여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파업 중인 동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특별히 할 얘기는 없다. 이미 사상 최고의 투표율·찬성률로 파업이 가결되었고 많은 사람이 동참하고 있다. 승리는 시간문제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고 싶다. 이들이 마지막 선택을 하면 중요한 힘이 될 것 같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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