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학은 1978년 오카야마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3세다. 그의 할아버지가 1920년대 공부를 하겠다고 전라남도 광양군에서 일본 오카야마로 건너왔다. 안영학 가족 ‘재일(在日)’의 시작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도쿄로 이사한 안영학은 민족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유창하게 한국말을 구사하지만 안영학은 ‘어머니’ ‘아버지’ 같은 간단한 단어를 제외하면 집에서도 주로 일본어를 썼다. 재일조선인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민족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조선인과의 인연이 거의 없었을 환경이었다. 민족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배웠고, 조선인이라는 민족의식도 갖게 되었다. 안영학은 자신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진 못 했고 그저 축구가 좋았다고 했다.

지난 8월5일 안영학의 모교인 도쿄조선중고급학교에서 안영학 ‘은퇴 경기’가 열렸다.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안영학의 꿈을 누구보다 믿고 응원해준 선배 박득의씨가 기획하고 지인들이 마음을 모아 개최한 경기다. 32℃에 습도까지 높아 불쾌지수가 상당했지만, 500여 명이 모여 안영학의 은퇴를 기념했다. 안영학이 처음으로 프로 생활을 한 알비렉스 니가타의 서포터 25명과 요코하마 FC의 서포터들도 참석했다. 알비렉스 니가타에는 ‘고레!AN후원회’라는 모임이 있다. 많을 때는 300명이 넘었다는 ‘고레!AN후원회’는 니가타의 재일조선인들이 발족했지만, 실제 모인 서포터는 일본인이 더 많았다. 15년째 안영학 선수의 서포터인 스다 사토코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스다 사토코 씨는 그의 투혼과 집념, 팀을 위한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 축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응원하는 게 행복했다고 한다.

알비렉스 니가타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안영학은 팀의 일본 프로축구 J2 리그 우승과 J1 리그 승격에 공헌했으며, 2004년 J리그 전반기 베스트 11에 뽑혔다. 2005년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했지만, 니가타 서포터들의 사랑은 식지 않았다. 3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안영학을 통해 니가타의 서포터들은 서로 평생지기가 되었고, 안영학 선수와도 평생 우정을 맺었다. ‘고레!AN후원회’ 서포터들은 안영학을 통해 재일조선인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한국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식 발음이 아니라 ‘안영학’이라는 한글 발음 그대로 그를 부르고 ‘이겨라 안영학’이라는 한국말로 된 응원가를 부른다. 서포터들은 지난 4월30일 알비렉스 니가타가 15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친 안영학 선수의 은퇴 세리머니를 열어줬을 때도, 8월5일 모교 은퇴 경기에서도 ‘이겨라 안영학’을 불렀다.

안영학이 재일조선인, 더구나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을 때마다 안영학에 대한 서포터들의 사랑은 더 강해졌다. 특히 2002년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이 알려지자 안영학을 비방하는 댓글이 넘쳤고, 구단으로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포터들은 “국적은 관계가 없다, 그저 축구 선수 안영학이 좋아서 그가 선택한 길을 응원한다”라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축구 선수를 키우는 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4강에 올랐을 때 안영학은 홍명보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열광하면서 감격해 울었다. 북한의 국가대표팀 경기를 본 적이 없는 안영학에게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국가대표가 보여준 활약은 월드컵 출전과 국가대표라는 새로운 꿈을 심어줬다. 조선적을 가진 재일조선인인 그가 월드컵 무대에 서려면 한국이나 일본으로 국적을 바꾸거나 조선적 그대로 북한의 국가대표가 되는 선택지밖에 없다.

광복 후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법적으로 무국적으로 분류되는 ‘조선적’이 부여되었다. 여전히 한국과 일본 언론에서 ‘북한 국적’이라고 잘못 보도하는 ‘조선적’은 국적이 아닌 그저 기호일 뿐이다. ‘재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 중 여러 사연으로 지금도 조선적인 이들이 있다.

안영학은 자신이 가진 것 그대로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하고 싶다고 열망했고, 그렇게 한 걸음씩 걸어왔다. 2002년 북한 국가대표 선발, 2006년 1월~2008년 1월 부산 아이파크에서 활약, 2008년 1월~2009년 12월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활약, 2010년 제19회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예선과 2011년 제15회 카타르 아시안컵축구대회 북한 국가대표로 출전. 조선적을 가지고 J리그와 K리그에서 활약하며 북한의 국가대표로도 뛴 안영학. 그는 후배들에게 이런 길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무국적자인 안영학이 국경을 넘어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외 경기를 갈 때마다 한국 정부가 발급한 3개월 혹은 6개월짜리 여행증명서, 일본의 재입국허가서, 북한의 여권까지 3개 모두를 가져가야 하고, 한국의 여행증명서를 갱신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와 급하게 여행증명서를 재발급받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해외 공항에서 왜 여권이 3개나 되느냐, 스파이가 아니냐며 추궁당한 적도 있다.

2010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그는 한국을 방문할 수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조선적 보유자의 한국 방문 시 필요한 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은퇴 후 안영학은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다.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는 재일조선인 축구 선수를 많이 양성하는 것이다. 단지 축구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인격도 훌륭해서 사랑받는 선수를 키우기 위해 안영학은 지금 축구교실을 열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의 축구 선수들, 그리고 북한의 선수들까지 어떤 제약도 없이 서로의 축구팀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안영학이 그리는 또 하나의 미래다.  

ⓒ이령경 제공8월5일 은퇴 경기 후 서포터들은 안영학 선수의 모교에 플래카드를 기증했다.

‘고레!AN후원회’ 서포터들은 그런 안영학의 새로운 꿈을 묵묵히 지원한다. 8월5일 은퇴 경기에서 서포터들은 안영학 선수가 공을 차는 모습 옆에 ‘魂(혼), 안영학, 마음은 하나’라고 쓴 플래카드를 안영학의 모교에 기증했다. 2003년부터 안영학이 뛰던 니가타에서, 일본 전역에서, 한국에서, 그리고 북한 대표로 뽑혀 일본 대표팀과 경기를 했을 때도 응원하며 들었던 그 플래카드다. 서포터들은 안영학의 후배들에게 “알비렉스 니가타로 오라”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열심히 서포트하겠다. 같이 우승하자. 월드컵에 가자”라고 러브콜을 보냈다. 안영학과 그의 서포터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꿈을 이어가고 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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