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은 역대급 더위였는데 올여름도 만만치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폭염주의보가 울린다. 시원한 곳이 간절한데 마침 ‘극지연구소와 함께하는 남극체험단’을 모집 중이란다. 홍보 영상에 나영석 PD가 남극 세종기지에 방문하려다 기상 악화로 실패한 이야기를 꺼냈다. 남극이니까 여름에도 춥겠지? 날씨는 며칠 기다리면 풀릴 텐데 핑계 삼은 것 아닐까?

내 어설픈 의문에 답을 해준 그래픽노블이 있다. 남극 탐험 논픽션 〈남극의 여름〉이다. 만화가 에마뉘엘 르파주는 프랑스 극지연구소로부터 프랑스·이탈리아 남극 공동기지에 가서 과학 프로젝트를 관찰하고 연구소의 업무와 일상을 만화로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르파주는 사진가인 친동생 프랑수아 르파주와 동행한다.
 

〈남극의 여름〉 프랑수아 르파주·에마뉘엘 르파주 지음, 박홍진 옮김, 길찾기 펴냄


한 명은 남고 한 명은 떠나야 한다

두 사람은 탐험대에서 그저 관찰자가 아니었다. 자급자족할 수 없는 남극 기지에서 보급은 매우 중요하다. 최소한의 인원과 최대한의 물자를 실은 쇄빙선을 타고 남극에 내린 후 다시 내륙에 있는 콘코르디아 기지까지 1200㎞를 운전해야 한다. 물론 남극에 고속도로 따위는 없다. 특수 트랙터를 타고 극한 환경 속에서 평균 시속 12㎞로 움직여야 한다. 두 형제는 트랙터 운전을 맡았다. 한여름 남극 대륙의 평균기온은 영하 30℃,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 얼음 평원뿐이다. 너무 춥고 건조해서 크레용이 도화지에 잘 묻지도 않는다. 대체 아문센은 100년 전에 어떻게 개썰매를 타고 남극점까지 갔을까?

모든 훈련과 준비, 자랑까지 마치고 흥분이 최고조에 달한 출발 전날. 쇄빙선은 기상 악화로 빙하에 갇혀버린다. 흥분은 실망으로 바뀌고 형제는 그저 배가 움직이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일정 때문에 보급 프로그램이 변경되면 둘의 모험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형제는 2주 후 남극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다. 환호성도 잠시 그들을 반기는 건 극심한 뱃멀미였다. 2주간의 힘든 항해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뒤몽 뒤르빌 기지(DDU)에 도착한다.

 

 

 

 


또 한 번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늘어진 일정 때문에 곧 겨울이 찾아올 터라 기지에 보급을 마치면 DDU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야 한다. 본래 형제는 DDU로 돌아와 기지의 연구 활동과 생활 모습을 책으로 쓰려 했다. 이제 한 명은 DDU에 남아 기지를 취재하고, 한 명은 보급을 위해 트랙터를 몰고 떠나야 한다. 누가 남고 누가 떠날 것인가?

에마뉘엘 르파주는 〈체르노빌의 봄〉으로 인간이 떠난 체르노빌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르포르타주 그래픽노블의 격을 한 차원 높였다. 〈남극의 여름〉 역시 거친 바다에서 새하얗고 동시에 푸르스름한 거대 빙하와 마주치는 감동, 귀여운 펭귄의 순수함, 고립된 환경에서도 유지하려 애쓰는 인간미처럼 쉽게 접할 수 없는 남극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다. 그림에 감탄하고 있으면 어느새 사진이 나타난다. 그림과 사진 사이에 위화감이 없다. 스펙터클보다는 고독과 마주하는 모험이지만 뱃멀미와 추위, 지루한 기다림에도 끈기 있게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논픽션 그래픽노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남극의 여름〉을 읽었으니 나는 굳이 남극체험단에 도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

 

 

 

 

 

 

 

기자명 박성표 (〈월간 그래픽노블〉 온라인콘텐츠 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