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소리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얼마나 짝짓기가 하고 싶으면 저렇게 울어대겠어. 딱 내 심정이야.” 여름방학 처음 며칠은 빈둥대며 학교 안 간다는 기쁨을 만끽하던 아이가 친구 타령을 시작했다. 베란다 창가에 ‘놀 친구 구함’ 깃발이라도 내걸고픈 표정이었다. 며칠 고독에 몸부림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학원 앞에서 어슬렁거리기, 라면 끓여준다고 꼬시기, 자질구레한 창작품 선물하기, 급기야 친구네 부모에게 들이대 가족 여행길에 따라나서기 등 나름 놀 방안을 찾는 눈치이다. 방학인데도 혹은 방학이라 더 시간에 쫓기는 초등 고학년 머리 굵은 아이들을 양육자가 나서서 ‘섭외’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 맞는 친구를 찾아도 이번에는 같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시무룩해한다. 유독 곤충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다. 한동안 공부에 매진하더니 (공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부모의 판단에) 예능 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학생이 되기 전에 ‘승한 재능’을 찾기 위해 영어·수학 수업은 기본으로 깔아주고 노래·바이올린·미술 수업까지 받느라 도통 시간이 없다. 매미 잡자, 잠자리 잡자 제안해도 심드렁하다. 대신 학원 숙제도 할 겸 도서관에서 만나자고 한다. 숙제는 핑계고 그렇게라도 (부모 눈치나 자기 마음에나) ‘합법적으로’ 놀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하는 사교 활동이란 대단히 제한적이다. 학습지까지 싸 들고 와서 만나면 “놀아도 노는 게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마냥 흔들리는 눈빛으로 매점과 서가를 배회하게 된다. 같은 문제집을 들고 온 아이들이 푼 걸 서로 베끼는 장면도 보았다. 그중 한 아이는 초등 저학년 때 못 푼 문제집 몇 장을 상습적으로 뜯어내다 엄마에게 ‘걸린’ 전력이 있다.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는 그 엄마의 푸념을 들으며 얼마나 할당량이 많기에 뜯어내고도 티가 안 났을까 궁금했다.

ⓒ김보경 그림

철봉을 잘해 놀이터를 주름잡던 한 친구는 몇 년 얼굴 보기 어려울 정도로 학원 뺑뺑이를 돈 결과 팔다리 근육이 풀려버렸다. 뛰고 구르고 매달리기가 되지 않아 그렇게 즐기던 잡기 놀이를 할 수가 없다. 막간의 학원 이동 시간에는 길 가면서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날렵하던 체구는 어디 가고 구부정한 등짝만 남았다. 또 다른 친구는 금요일 저녁 보호자 없이 친구와 밥을 사먹는 것으로 한 주간 ‘학습 노동’의 스트레스를 푼다. 식사 뒤에는 자기들끼리 이마트나 다이소로 간다. 허접한 문구류 등을 쇼핑하며 뻔한 ‘불금’의 시간을 보낸다. 왜 이러고 노는 걸까. 노는 감을 잃어서다.

시간과 친구에 이어 욕구마저 잃어버린 일상

노는 감을 잃은 아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뭐 할래? 아무거나. 뭐 먹을래? 상관없어. 언제 놀 수 있어? (엄마에게) 물어봐야 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못한다. 내일이나 주말은 물론 당장 오늘의 일과도 모른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지 변별하지 않는다. 반복된 ‘좌절’의 결과이다. 그래서 그냥 그때그때 허용된 것만 한다. 또래끼리의 놀이와 그를 통한 교감이라는, 밥과 잠 다음으로 큰 성장기 동력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숙제(고통) 분담이든 소비적 유흥이든 친구와 함께하려는 아이는 그나마 최소한 ‘관계의 욕구’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혼자 방 안에, 폰 화면에 갇혀버린 아이들은 아예 출구가 없다. 더 더 더 자극적인 정보가 아니면 거대한 무기력이 일상을 뒤덮을 공산이 크다. 욕구가 있어야 모자람을 알고 채우고자 애도 쓴다. 만족도 한다. 시간과 친구에 이어 욕구마저 거세된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어찌 될까. 지금 학령기 자녀를 둔 우리 세대가 아이를 기르는 모습이 나는 두렵다.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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