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김사복씨는 어디 있을까?” 영화 〈택시운전사〉를 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떠올렸을 질문이다. 사실 영화도 김사복씨로부터 시작됐다. 제작사인 ‘더 램프’의 박은경 대표는 2014년 우연히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당시 자신을 광주까지 데려다준 택시운전사 김사복을 잊지 못한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이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제작 전 5·18 기념재단에 부탁해 김사복씨의 소재를 파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기봉 5·18 기념재단 사무처장은 “당시 제작사의 요청으로 경찰의 도움을 받아 몇 명의 후보 사진을 힌츠페터 씨에게 보냈더니,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 이후 더 이상 진전이 안 됐다”라고 말했다. 김사복씨를 찾으려는 사람은 박 대표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 사무처장은 10년 전에도 송건호 언론상 수상을 위해 한국에 온 힌츠페터 씨의 부탁으로 김사복씨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실패했다. 영화 개봉 직후인 8월5일, SNS에 자신이 김사복씨의 큰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계정 ‘김승필’이 생겼다. 그는 ‘그 당시 독일 기자분들과 광주를 다녀오셔서 들려주신 얘기와 많은 부분이 영화 내용과 일치했고 아버님은 김사복이란 본명을 사용하시면서 당당히 사시다가 1984년 12월19일 6개월의 투병 생활을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라고 밝혔다. 제작사는 김씨로부터 김사복씨 사진을 전달받아 사실 여부를 확인 중이다.
 

ⓒDaum 갈무리영화 〈택시운전사〉(위)는 1980년 5월, 서울의 택시운전사 만섭과 독일 기자 피터가
광주의 참상을 목도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김사복씨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은 없을까?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힌츠페터 씨를 비롯한 외신 기자 8명과 내신 기자 9명의 취재 경험담이 담긴 책 〈5·18 특파원 리포트〉(풀빛, 1997)에서 김사복씨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힌츠페터 씨 홀로 한국에 오고, 김사복씨와 우연한 계기로 광주를 같이 가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힌츠페터 씨가 쓴 책에 따르면 혼자가 아니었고, 김사복씨와 미리 약속도 되어 있었다. 1980년 5월19일 도쿄 특파원이었던 힌츠페터 씨는 독일 ARD-NDR 방송국의 동료인 헤닝 루모어 씨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루모어 씨는 필름 편집자이자 음향효과 담당이었다. 두 사람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김사복씨를 만났다. 광주로 향했던 5월20일, 김사복씨의 택시에는 힌츠페터와 루모어 씨 외에도 또 다른 독일인 취재기자 한 명이 동승했다. 이날 김사복씨는 모두 세 명의 승객을 태우고 광주로 향했다.

김사복씨의 흔적은 또 다른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힌츠페터 씨와 김사복씨가 간신히 광주를 탈출하고 다시 만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된다. 〈The Kwangju Uprising(광주항쟁)〉(Routledge, 2000) 중 힌츠페터 씨가 쓴 ‘I Bow My Head’에 따르면, 그는 5월22일 아침 도쿄로 돌아가 광주에서 찍은 필름을 동료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날 오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다음 날인 5월23일 다시 광주로 향했다. 이때도 김사복씨와 함께였다. 이날 택시는 광주에서 26㎞ 떨어진 검문소에서 제지당했다. 힌츠페터 씨는 검문에 걸리자 지니고 있던 〈코리아 헤럴드〉의 기사를 꺼냈다. ‘외국인의 여행 자유는 최대한 보장된다’라는 내용이었다. 계엄군은 운전자인 김사복씨가 한국인인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김남영 교육생차량 시위대에 참여했던 이행기씨와 장훈명씨 (사진의 왼쪽부터)

힌츠페터 씨는 그 자신의 이름보다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수식어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1980년 9월, 광주에서 찍은 영상으로 45분짜리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을 제작했다. 이 영상은 5·18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상영되었던 바로 그 영상이다. 혹시 이 영상에 김사복씨의 모습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5·18 기념재단을 통해 영상을 입수해 살펴봤다.

군인들 쫓아내자고 결의했던 택시기사들

힌츠페터 씨가 처음 광주를 방문했던 5월20일, 도로를 가득 메운 것은 차량시위 중인 버스와 택시였다. 버스 11대와 택시 200여 대가 계엄군이 주둔했던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택시기사라면 김사복씨를 알지 않을까. 단서를 찾기 위해 당시 차량시위에 참여했던 택시기사들을 만났다.

이행기씨(65)는 택시 200여 대 중 한 대를 타고 도청으로 향했던 사람이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는데 공수부대가 들어오드랑께. 내 앞에 택시가 젊은 학생을 싣고 가는 걸 보고 계엄군이 택시를 세웠어. 택시기사가 항의헌께로 총으로 한두 번도 아니고 다섯 번, 열 번을 막 내리찍는겨. 운전석 안에 갇혔는디 뭐 어쩌겄어? 반대쪽에서는 젊은 사람을 마구잡이로 끄집어 내리고. 그거 보는디 ‘이거 아닌디’ 싶은 거지.”
 

ⓒ김남영 교육생궐기대회에 참여한 시민군 곽희성씨(위)의 모습.

공수부대의 잔인함과 무도함을 목격한 택시기사는 이씨만이 아니었다. 택시기사들은 모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했다. “군인들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여? 우리가 내쫓아버립세.” 그렇게 결의한 택시기사들이 입소문을 냈다. 5월20일 오후 4시, 무등경기장(당시 광주공설운동장)에서 택시 30여 대가 경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광주역을 거쳐 금남로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택시가 200여 대로 불어났다. 이씨는 시민과 함께했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마구 내달리는 게 아니라, 택시 밖에서 시민들이 우리랑 함께 가니께 도청 앞까지 가는기 두어 시간 걸렸지라.” 몰려드는 차량들을 막기 위해 도청으로 공수부대 1대대가 긴급히 충원됐다. 그만큼 상당한 규모의 시위였다.

힌츠페터 씨는 두 번째로 광주를 방문했던 5월23일 ‘1차 범시민 궐기대회’를 촬영했다. 학생,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도청 앞에 모여 결의문과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궐기대회는 5월26일까지 모두 다섯 번 개최됐다. 당시 시민군으로 그 현장에 있었던 곽희성씨(58)는 담배를 내밀며 영상을 찍게 해달라고 했던 독일 기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죽은 고등학생을 보고 도청으로 왔어요. 도청에서 총기를 받고 (시민군으로) 배치받았제. YMCA 빌딩 옥상으로 올라와서 궐기대회 하는 동안 우리 분대원 6명이랑 보초를 서고 있었소. 기자들이 얼굴 못 찍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디 그 기자가 와서 ‘한 번만 찍게 해달라’고 한 거요. 내가 책임자라 못 찍는다 허니께, 자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는 애들한테 나눠주드라고. 그 와중에 애국가가 나왔어. 애국가가 나오는디 죽은 사람들 생각나 내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여. 울고 있을 때 영상을 찍었더라고.”
 

ⓒ김남영 교육생위르겐 힌츠페터 씨의 유해 일부가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에 안치됐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힌츠페터 씨의 생전 인터뷰 영상으로 끝난다. “김사복, 정말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서울에 도착해 당신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며 그동안 많이 바뀐 한국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힌츠페터 씨는 김사복씨를 만나지 못한 채 지난해 1월25일 숨졌다. ‘광주에 묻히고 싶다’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머리카락과 손톱 등 유해 일부와 유품이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에 안치됐다. 그의 묘지에는 영화를 본 시민들이 두고 간 생화와 노란리본, 그리고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편지가 놓여 있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 김사복씨를 찾다가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간다는 말에 한 택시기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기자 양반도 참말로 답답허요. 살아계셔도 내라면 안 나타나지라. 민주화되고 정권 바뀌었는디도 우덜보고 폭도라고 하는디 나타나것소?”

기자명 광주·김남영 (〈시사IN〉 교육생)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