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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총을 든 난동자’로 묘사된 광주 시민들

고제규 편집국장 unjusa@sisain.co.kr 2017년 08월 14일 월요일 제5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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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공적’이 되었다. ‘삼성 장충기 문자 메시지’ 기사가 나가자, 큰 언론사의 윗사람들이 불편해했다고 한다. ‘그럼 너희는 깨끗하냐’ ‘<시사IN>은 삼성 광고 안 받느냐’ 따위 냉소를 받았다. 작정하고 날것 그대로 기사화한 것은 반성과 자성을 바랐기 때문이다. 몇몇 언론사는 현장에서 뛰고 있는 기자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부끄러움은 왜 늘 젊은 기자들 몫일까? 또 한 번 큰 언론사의 윗사람들이 불편해할 기사 하나를 공개한다.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중략) 바리케이드와 무기 반납소 사이에는 인도에 수십명의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일요일에 교통이 차단된 어느 번화가의 모습과도 흡사했지만 사람들은 그 번잡했던 거리가 벌써 7일째 텅 비어 있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1980년 5월25일자 ‘바리케이드 너머 텅 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기사 중 일부다. ‘광주 화정동에서=김대중 기자’가 썼다. 그때 김대중은 사회부장이었다. 5월24일 신군부는 일간지 사회부장을 광주로 데려갔다. 사회부장들에게 100만원 촌지를 안긴 뒤였다. 당시 사회부장 월급이 45만원 정도였다(윤덕한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김대중 기자가 서 있던 화정동에서 5㎞ 떨어진, ‘난동자들이 서성이던’ 곳에 나도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광주는 ‘주먹밥 공동체’였다. 그때 광주에 그 많은 총기가, 김 기자가 규정한 ‘난동자’와 ‘과격파’ 손에 쥐여졌지만 항쟁 기간에 단 한 건의 강도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나중에 김대중은 “별것도 아닌 스케치 기사를 놓고 검열 당국은 ‘폭도’라는 단어를 쓸 것을 (기사) 통과의 조건으로 냈다. 승강이 끝에 나는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는 표현으로 고쳐줬다”라고 밝혔다(김대중 외 <5·18 특파원 리포트>, 1997).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하자, 전두환씨 측근인 민정기씨는 “악의적인 왜곡이나 날조가 있다면 법적 대응을 검토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씨 자신도 회고록을 통해 “5·18은 ‘폭동’ 외에 표현할 말이 없다”라고 썼다. 이들이 망언을 일삼는 건 <조선일보>를 비롯한 권언유착 언론이 끔찍한 학살을 화려한 수사로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기자가 광주를 과격파의 소굴로 단정하는 기사를 쓸 때 <택시운전사>에도 나온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이런 사직서를 썼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김대중 고문은 이제 ‘별것도 아닌 칼럼’을 그만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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