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 ‘공적’이 되었다. ‘삼성 장충기 문자 메시지’ 기사가 나가자, 큰 언론사의 윗사람들이 불편해했다고 한다. ‘그럼 너희는 깨끗하냐’ ‘〈시사IN〉은 삼성 광고 안 받느냐’ 따위 냉소를 받았다. 작정하고 날것 그대로 기사화한 것은 반성과 자성을 바랐기 때문이다. 몇몇 언론사는 현장에서 뛰고 있는 기자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부끄러움은 왜 늘 젊은 기자들 몫일까? 또 한 번 큰 언론사의 윗사람들이 불편해할 기사 하나를 공개한다.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중략) 바리케이드와 무기 반납소 사이에는 인도에 수십명의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일요일에 교통이 차단된 어느 번화가의 모습과도 흡사했지만 사람들은 그 번잡했던 거리가 벌써 7일째 텅 비어 있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1980년 5월25일자 ‘바리케이드 너머 텅 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기사 중 일부다. ‘광주 화정동에서=김대중 기자’가 썼다. 그때 김대중은 사회부장이었다. 5월24일 신군부는 일간지 사회부장을 광주로 데려갔다. 사회부장들에게 100만원 촌지를 안긴 뒤였다. 당시 사회부장 월급이 45만원 정도였다(윤덕한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김대중 기자가 서 있던 화정동에서 5㎞ 떨어진, ‘난동자들이 서성이던’ 곳에 나도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광주는 ‘주먹밥 공동체’였다. 그때 광주에 그 많은 총기가, 김 기자가 규정한 ‘난동자’와 ‘과격파’ 손에 쥐여졌지만 항쟁 기간에 단 한 건의 강도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나중에 김대중은 “별것도 아닌 스케치 기사를 놓고 검열 당국은 ‘폭도’라는 단어를 쓸 것을 (기사) 통과의 조건으로 냈다. 승강이 끝에 나는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는 표현으로 고쳐줬다”라고 밝혔다(김대중 외 〈5·18 특파원 리포트〉, 1997).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하자, 전두환씨 측근인 민정기씨는 “악의적인 왜곡이나 날조가 있다면 법적 대응을 검토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씨 자신도 회고록을 통해 “5·18은 ‘폭동’ 외에 표현할 말이 없다”라고 썼다. 이들이 망언을 일삼는 건 〈조선일보〉를 비롯한 권언유착 언론이 끔찍한 학살을 화려한 수사로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기자가 광주를 과격파의 소굴로 단정하는 기사를 쓸 때 〈택시운전사〉에도 나온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이런 사직서를 썼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김대중 고문은 이제 ‘별것도 아닌 칼럼’을 그만 써야 한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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