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과 양육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과제이다.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 국가의 현재와 미래에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출산과 양육은 여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전적으로 ‘엄마 몫’이다. 개인화되고 사유화된 출산과 양육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 대세일 때, 기혼 여성들이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것은 어렵다. ‘맘충’ 또는 ‘솥뚜껑 운전사’ 등 양육과 살림을 하는 여성에 대한 다양한 비하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결혼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편견과 역할 규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개별성이 부재한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엄마’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가치 절하되고 부정되곤 한다. 결국 이러한 사회는 ‘모성의 이데올로기화’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다층적 모습들을 억압하는 사회가 된다.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더구나 한국 ‘엄마들’은 특유의 입시제도로 인해 자신의 성공 여부가 자식의 대학 입학 결과로 테스트받아야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양육 과정에서 ‘엄마 몫’이 더욱 비대해지는 것이다.
미국에서 큰 학회에 갈 때마다 내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학회에 오는 아기들이다. 아기들을 데리고 학회 세션에 들어오거나 학회장에서 우유를 먹이는 장면은 이제 특이하지 않다. 그 아기들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많다. 학회가 열리는 곳에서 모유를 먹일 공간을 찾는 것, 모유를 먹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흔해졌다. 큰 학회가 열리는 곳에서는 대부분 아이를 돌보아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학회에 참석하곤 한다.
유사한 장면을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할까. 한국에서 학회장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아빠 학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엄마 학자들이 혹시 눈에 띄게 되면 ‘애 엄마가 집에서 애나 기르지, 무슨 학회까지 데리고 오나’ 하는 시선을 던질 것이다. 다른 학자들을 방해하는, 눈치 없고 이기적인 ‘맘충’이라는 표지가 붙여질지도 모르겠다.
타자를 향한 시선은 강력한 언어이다. 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아빠 엄마, 대학원에 다니며 아기를 낳고 기르는 엄마 아빠, 결혼 후 직장 생활을 하며 아픈 아이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하는 아빠 엄마, 학회에 아기를 데리고 오는 엄마 아빠가 있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타자를 향한 시선은 강력한 언어다
한국의 학회장에서, 다양한 공적 공간에서 아기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아빠 또는 엄마들을 보고 싶다. 학회장에서 모유를 먹이는 엄마나 우유를 먹이는 아빠를 따스하고 인정하는 미소로 바라보는 시선들을 보고 싶다. 그러한 변화들이 소리 없이 한 귀퉁이에서라도 진행되기 시작할 때, 지금보다는 훨씬 인간화된 사회가 될 것이다.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출산과 양육이라는 중요한 사회 국가적 과제를 혼자서 끌어안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21세기에 한 인간으로서 꿈과 희망을 펼쳐가고자 하는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의 책임이 온통 자신의 어깨에 놓일 것임을 보면서 ‘감히’ 출산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대학에서, 지역에서, 또는 학회장에서 아기들과 아이를 보호하고 맡아주는 시설과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기들을 동반하는 아빠 엄마의 등장을 냉소와 비난이 아닌 따스한 지지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출산과 양육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원적인 변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