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명성을 가진 독일 자동차 업계가 담합 의혹에 휩싸였다. 독일 5대 자동차 제조업체인 폭스바겐·아우디·포르쉐·BMW·다임러 벤츠가 1990년대부터 업계의 여러 사안에 대해 ‘공동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이번 스캔들은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특종 보도로 알려졌다. 〈슈피겔〉은 폭스바겐이 2016년 7월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한 문서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슈피겔〉에 따르면 다임러 벤츠·폭스바겐·아우디·포르쉐가 독일 공정거래위원회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자신들의 담합 혐의를 시인했다. 한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담합을 한 기업이 자진 신고를 하면 벌금이나 과징금을 면제해주는 이른바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제) 덕을 보기 위해서다. 지난해에도 폭스바겐과 다임러 등 4개 업체의 트럭 판매 담합이 적발된 바 있다. 이때도 EU로부터 모두 29억 유로(약 3조6000억원)라는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다임러는 11억 유로를 냈지만, 폭스바겐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폭스바겐이 자진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BMW는 어려움에 빠진 폭스바겐이 자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슈피겔〉에 담합을 제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AP Photo폭스바겐은 독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다임러 벤츠·폭스바겐·아우디·포르쉐의 담합 내용을 담은 문서를 제출했다.
위는 폭스바겐의 SUV 티구안 생산라인.

지금까지 독일 자동차 산업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 발전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보도에서 이 같은 신화가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폭스바겐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한 문서에 따르면 독일 5대 자동차 회사는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가격, 개발 전략, 판매까지 광범위한 문제에 걸쳐 담합해왔다. 예를 들면 오픈카 지붕 개폐 기준도 서로 상의해 결정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시속 몇㎞에서 지붕이 열리고 닫히는지를 공동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 최고 시속 50㎞까지만 오픈카 지붕이 열릴 수 있게 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디젤 차량의 요소수 탱크 크기 담합이었다. 디젤 차량에는 애드블루라는 요소수가 사용된다. 애드블루 요소수는 디젤 차량이 배출하는 유해한 질소산화물을 무해한 물과 질소로 분해하는 작용을 한다. 애드블루를 많이 사용할수록 질소산화물의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자동차 회사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요소수 탱크 크기를 줄이기로 담합했다.

2006년 요소수 탱크 용량을 35ℓ로 정했던 폭스바겐·아우디·BMW·다임러 벤츠 사는 2008년 요소수 탱크 크기를 8ℓ로 줄이는 데 합의했다. 차량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비용을 절감하며, 트렁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담합이었다. 문제는 8ℓ 요소수 탱크로는 6000㎞ 이상을 주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 당국은 자동차 허가를 위해 최소 1만6000㎞당 교체할 수 있는 요소수 탱크를 요구했다. 당시 아우디에서 만든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최소 19ℓ짜리 요소수 탱크가 필요했다. 다임러·폭스바겐·BMW도 같은 의견이었다. 자동차 회사들은 공동 해법을 찾았다. 유럽에 공급하는 모델에는 8ℓ 탱크를 사용하고, 미국에 공급하는 모델에는 16ℓ 탱크를 쓰기로 합의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질소산화물 배출에 대한 법적 기준이 엄격해지면서 자동차 업계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새 기준치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애드블루 사용량을 늘려야 했다. 하지만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요소수 탱크의 용량을 늘리는 대신 또다시 잘못된 공동 결정을 했다. 폭스바겐 그룹의 계열사인 폭스바겐·아우디·포르쉐는 디젤 차량에 배기가스 양을 조절하는 불법 소프트웨어를 설치한 것이다. 2015년 폭스바겐 그룹 계열사가 적발되었고, 다임러 벤츠도 유사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한 혐의로 슈투트가르트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배기가스 배출 시험 때만 애드블루가 정량 사용되고 실제 주행 시에는 사용을 줄이도록 설계되었다.

독일 정치인과 자동차 회사의 유착도 폭로

독일의 5대 자동차 회사들은 이번 담합 스캔들로 위기에 처했다. 막대한 과징금, 법적 처벌뿐 아니라 요소수 탱크 크기 담합으로 인해 크고 작은 소송에 휘말릴 것으로 보인다. 독일 차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 추락도 우려된다. 독일 안에서는 정치권과 자동차 업계의 유착관계에 대한 비판도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독일 주요 언론은 정치권이나 정부에서 활동하다 자동차 회사의 로비스트가 되거나, 자동차 산업의 로비스트로 있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한 이들을 조명하는 기사를 잇달아 내보냈다. 대표적인 인사가 현 독일 자동차산업협회(VDA) 회장인 마티아스 비스만이다. 그는 1993~1998년 헬무트 콜 정부에서 교통장관을 역임했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환경장관으로 재직했다. 마티아스 비스만 회장은 문자 메시지로 메르켈 총리에게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인사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2013년 5월 메르켈 총리에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이산화탄소 배출량 제한 목표치를 높게 설정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메르켈 정부에서 2009~2013년 국무위원을 지낸 에카르트 폰 클래덴은 다임러 그룹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한다. 그 또한 메르켈 총리와 가까운 관계로 알려졌다.

ⓒAFP PHOTO정치권과 유착된 인물로 꼽히는 마티아스 비스만 독일 자동차산업협회 회장(위).
ⓒEPA5월22일 다임러 그룹의 대규모 배터리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에서 세 번째)와 디터 제체 다임러 그룹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메르켈 총리의 기독민주당 소속 정치인만 자동차 업계와의 유착 의혹에 휩싸인 것은 아니다. 독일 일간지 〈빌트〉는 8월5일 사회민주당 소속 니더작센 주 총리인 슈테판 바일과 폭스바겐의 유착관계를 폭로했다. 니더작센 주는 폭스바겐 주식의 20.2%를 소유하고 있다. 폭스바겐의 내규에 따라 니더작센 주 총리는 자동으로 이사회에 소속되며 회사의 주요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빌트〉에 따르면 바일 총리는 2015년 10월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스캔들이 불거지자 주정부 발표문을 폭스바겐에 보내 검토를 받았다. 바일 총리는 “법률적 관점에서 사실 확인을 했을 뿐이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빌트〉는 발표문이 폭스바겐 경영진에 의해 수정되고 폭스바겐에 긍정적인 어조로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녹색당의 쳄 외츠데미어 대표는 “바일 총리의 정책 연설이 승인을 받아 이뤄진 것이라면 이는 우리 시장경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배출가스 조작 사건의 주의회 조사위원장이던 헤르베르트 베렌스 의원은 “통제 대상(폭스바겐)에게 연설문을 보여준 자체가 엄청나고 황당하다. 니더작센 주의 진정한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자동차 산업은 독일 경제의 핵심이다. 자동차 산업 관련 일자리만 총 80만 개이며 한 해 총수입은 4500억 유로(약 604조원)에 달한다. 독일 정치권이 자동차 산업에 갖는 관심 역시 남다르다. 슈뢰더 전 총리는 ‘자동차 총리’로 불렸으며 ‘자동차 산업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메르켈 총리도 자동차 산업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알려졌다. 이번 담합 스캔들을 계기로 자동차 산업을 감시·규제해야 할 정부가 업계 편의를 지나치게 고려했다는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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