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과대학 및 종합대학의 ‘고의적 인종차별’을 수사하고 소송할 변호사를 구해야 함.” 최근 언론에 폭로된 미국 법무부 내부 문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 문서를 최초로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고의적 인종차별’이란 문구에 주목하며 “법무부 조치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계 학생들의 대입 특혜를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소수계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을 겨냥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전임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에서 교육장관을 지낸 존 킹은 성명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는 유색인 및 저소득 가정 학생들이 당하는 ‘기회의 부족’을 줄이기보다 소수계 우대 정책을 파괴하는 쪽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3000여 개에 달하는 미국 대학들은 신입생 전형 과정에서 이른바 소수계 우대 정책에 따라 흑인 및 히스패닉 학생들에게 입학 특전을 부여해왔다. 이 때문에 미국 전역의 대학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법무부는 내부용 문건이 폭로되자 부랴부랴 ‘부정확’하다며 발뺌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의중이 실렸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트럼프의 오른팔로 통하는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와 스티븐 밀러 정책고문 등이 이 같은 움직임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소수계 우대 정책은 공무원 채용에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로 1961년 도입됐다. 1964년 ‘흑백차별 금지’를 법제화한 민권법이 발효된 이후 고용은 물론 대학 입학에도 소수 인종, 특히 흑인을 배려하는 쪽으로 대폭 확대됐다. 이 정책은 흑인뿐 아니라 히스패닉이나 아시아계는 물론 저소득 혹은 저학력 가정의 학생들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명문·비명문대를 가리지 않고 미국 전역의 대다수 대학이 이 정책을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일부 보수 단체들은 ‘백인 학생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폐지를 주장해왔다.

이런 보수 단체들의 주장이 트럼프 행정부 들어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백인이 아닌 아시아계 학생들을 ‘명분’으로 삼았다. 법무부는 최근, 아시아계 차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하버드 대학 ‘인종차별 여부’도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 5월, 아시아계 단체 64개가 ‘입학 전형에서 아시아계를 차별했다’라며 하버드 대학을 고소했다. 당시는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었다. 2년 넘게 묵혀 있던 고소장이 보수적인 공화당 트럼프 행정부 시대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REUTERS2016년 12월9일 미국 워싱턴 대법원에서 대학 입시의 소수계 우대 정책에 대한 심리가 열리자, 아시아계 대학생들이 아시아계 차별을 철폐하라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의 법무부가 백인이 아닌 아시아계 학생들의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부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덴버 대학의 낸시 리엉 법대 교수는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8월3일)을 통해 “아시아계 미국인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파들이 아시아계 학생들에 대한 차별 문제를 적극 제기한 것은 아시아계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소수계 우대 정책을 철폐하려는 시도를 ‘백인 우월적 인종주의’ 때문이 아닌 것으로 치장하기 위해서다”라고 지적했다. 버지니아 대학 법대의 인종 문제 전문가인 킴 포르드-마즈루이 교수 역시 “트럼프 행정부가 소수계 우대 정책과 관련한 아시아계의 불만을 집중 거론한 것은 백인들의 이해와 상당히 부합하기 때문이다”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중산층 백인들의 지지를 결집하기 위한 정략적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본다. 공화당의 베테랑 자문가인 브렛 오도넬은 “이 문제는 자식들의 대학 입학이 불법 이민자 혹은 비백인의 자식들 때문에 가로막힌다고 보는 백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라고 〈워싱턴 포스트〉에 말했다. 실제 지난해 〈워싱턴 포스트〉와 ABC 뉴스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 가운데 44%가 자신들이 ‘흑인과 히스패닉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계 학생 차별’ 문제 제기로 판 흔들어

그렇다면 정말 아시아계 지원자들이 차별받는 것일까? 중국계 학생인 오스틴 지아 군은 한국판 대학수능이라 볼 수 있는 SAT(2400점 만점)에서 2340점을 획득했다. 고등학교 졸업 평점도 4.42(4.5 만점)였다. 운동과 토론, 음악 등 과외활동 분야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자신 있게 하버드 대학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하버드 대학은 입학 사정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신입생 선발 과정에서 지원자의 다양한 성적은 물론 연방대법원이 정한 법적인 기준, 나아가 전인격적 측면까지 면밀히 검토해서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1990년에는 교육부가 같은 문제로 하버드 대학 조사에 나섰다가 무혐의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당시 교육부는 아시아계 지원자들의 합격률이 백인보다 낮은 원인이 ‘레거시 프로그램(부모 혹은 형제자매가 하버드 출신인 경우 가산점을 부여)’ 탓이지 차별 때문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교육부는 2015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아시아계 차별 문제를 조사했다가 ‘그렇게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AP Photo‘텍사스 오스틴 주립대학의 소수계 우대 정책 때문에 낙방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애비게일 피셔.

이와 관련해 지난해 연방대법원 판결도 있었다. 2008년, 백인 여학생 애비게일 피셔가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학의 소수계 우대 정책 때문에 낙방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대학 측이 소수계를 뽑는 바람에 백인인 자신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연방대법원은 지난해 6월 4대3 간발의 차로 대학 측의 손을 들어줬다(지난해 3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방대법관 후보로 지명한 메릭 갤런드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장이 의회의 인준을 받지 못해 대법관이 8명이었다. 이 가운데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은 송무담당 연방 법무차관 재직 때 이 사건에 관여해 심리와 판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판결은 현재 미국 대법관의 이념 지형을 그대로 드러냈다. 진보적인 대법관으로 분류되는 스티븐 브레이어, 루스베이더 긴즈버그,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대학 쪽 손을 들어줬다. 보수적인 대법관으로 분류되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이 애비게일 피셔 손을 들어주었다. 3대3.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동성애자 인권이나 낙태 등에서 진보적 판결을 내려 ‘캐스팅보트’ 구실을 해온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진보 쪽에 합류하며 4대3 판결이 났다. 다수 의견(4명)은 “대학은 입학 정책이 다양성을 고양할 것인지 또는 희석할 것인지에 대한 가치 있는 데이터를 갖고 있다. 학교는 지속적으로 입학 프로그램의 공정성을 심사하는 데 이 데이터를 사용해야 하고, 변화하는 통계자료가 적극적(소수계) 우대 조치의 긍정적·부정적 효과를 내는지 확인해야 한다”라고 판결했다. 소수 의견(3명)은 “대학은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학생들이 소수자라는 연구를 제시했지만, 소수계 우대 정책이 실제로 이 상황을 개선했는지는 증명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시아계 학생이 소수자인 것이 왜 이 정책을 정당화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 정책이 아시아계 학생들을 불리하게 차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라고 다수 의견을 반박했다. 


이 판결 이후 대법관 지형이 다시 보수 우위로 돌아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뒤 보수 성향 닐 고서치를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공화당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진보 성향의 메릭 갤런드 대법관 후보자 인준을 거부했다. 대법원 판사의 이념에 따른 비율이 ‘보수 우위(진보 4명:보수 5명)’가 유지되었다. 하버드 등 여러 대학이 걸려 있는 소수계 우대 정책과 관련된 소송이 연방대법원까지 갈 경우 지난해와 다른 판결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8월 NBC 방송에 출연해 “소수계 우대 정책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랜 세월 이 정책과 함께 살아왔다”라고 말했다. 소수 인종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과시한 것이다. 트럼프는 불과 두 달 뒤 〈폭스 뉴스〉에 나와서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의 필요성이 언젠가 사라지면 좋겠다”라며 말을 바꿨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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