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에서부터 자궁까지 길이를 재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심호흡을 반복하며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려고 애썼다. 손톱은 진작 짧게 깎았고 괜히 손도 여러 차례 씻었다. ‘중지를 끝까지 밀어 넣었는데도 자궁이 만져지지 않으면 높은 자궁, 손가락을 대부분 넣었을 때 닿으면 보통 자궁, 일부만 넣어도 닿으면 낮은 자궁이랬지….’ 외울 만큼 읽은 정보를 곱씹다 자괴감이 덮쳐왔다. 신혜경씨(가명·31)는 변기 위에서 외로웠다. “내 몸이잖아요. 근데 만지는 게 꺼려지는 거예요. 내 몸을 잘 아는 게 중요하다고 아무리 머리로 생각해도 처음에는 선뜻 손이 안 가더라고요. 성기에 대해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저 역시 내면화하고 있었던 거죠.”

생리컵을 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종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크기와 용량, 경도도 천차만별이었다. 종 모양으로 생긴 체내 삽입형 생리용품인 생리컵은 주로 의료용 실리콘으로 만들어진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70년 전부터 판매를 시작해 현재 30여 개 브랜드가 출시돼 있었다. 되도록 다양한 제품을 직접 만져보고 써보며 시행착오를 거쳐 내 몸에 맞는 제품을 찾는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재로서는 해외 직구로밖에 살 수 없다. 실패할 확률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Google 갈무리개봉 예정인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위)에는 생리컵 사용기가 담겨 있다.

며칠에 걸쳐 블로그·SNS 후기와 유튜브를 샅샅이 살피고 영문 자료까지 찾아 읽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내 자궁 위치까지 알 수는 없었다. 사람의 외모만큼이나 질의 모양과 크기 역시 다양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신씨는 ‘나에 관한 연구’를 치열하게 거친 끝에 이번 여름 드디어 생리컵 사용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동안 안 써본 생리용품이 없었다. 생리용품 업체인 이지앤모어의 자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92%가 사용한다는 패드 형태 일회용 생리대만 해도 그 종류와 용도가 매우 다양하다. 생리통 경감에 도움이 된다더라, 냄새가 덜 난다더라, 착용감이 좋다더라, 피부 발진이 없다더라…. 신씨의 ‘생리 인생’ 16년은 내 몸에 맞는 생리용품을 찾아 나선 순례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국내외 제품을 막론하고 100% 만족감을 주는 제품은 없었다. 면 생리대도 시도해봤지만 집에 있는 시간보다 집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긴 회사원에게는 사용한 면 생리대 처리도, 세탁도 힘에 부쳤다.

‘다 그러려니’ 생리를 숙명처럼 여기고 살던 신씨가 생리컵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지난 3월이었다. 여성환경연대가 주최한 ‘여성 건강을 위한 안전한 월경용품 토론회’에서 김만구 교수(강원대 환경융합학부)가 생리대 방출 물질 검출 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보도에 따르면 시판 중인 생리대 중에 안전한 생리대는 없었다. 현재 생리대·탐폰 등 일회용 생리용품은 ‘의약외품’으로 구분되어 있어 제품 성분 공개 의무가 없다. 여성환경연대가 지난 5월 생리대 성분 표시를 모니터링한 결과, 유한킴벌리를 제외한 다른 업체는 일부 성분만을 표기하고 있었다. 6월2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도자 의원(국민의당)이 인체에 직접 닿는 의약외품의 성분 전체를 표기하자는 내용의 ‘약사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상태다.

생리대에서 발암성 1군 물질이자 생식독성인 벤젠까지 검출됐다는 이야기에 신씨는 생리컵 공부를 사실상 ‘강제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도 생리컵을 질 내에 삽입한다는 데 거부감이 있었어요. 탐폰도 그 이유로 못 써봤는데 탐폰보다 생리컵은 크기도 더 크잖아요. 그런데 정말 ‘신세계’였어요.”

어라? 생리 냄새가 안 나네

물론 넣는 것만큼이나 빼는 일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생리컵 사용 3년째인 이자영씨(30)는 해외에 거주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생리컵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씨 역시 화장실에서 종종 외로웠다. “나만 이런 걸까, 나랑 안 맞는 거 아닐까…. 초반에는 너무 안 빠져서 병원에 가서 빼야 하나 고민했어요. 몸에서 영영 안 나오면 어떡하지 걱정도 되고(웃음).”

ⓒ연합뉴스5월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이 생리대 유해물질 규제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적응기를 거치고 나니 생리컵만큼 편한 생리용품이 또 없었다. 일단 불쾌감이 사라졌다. 생리혈에서 난다고 생각했던 묘한 냄새는 생리대의 화학성분과 피가 만나 산화되면서 생기는 냄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변을 보는 일도 한결 쾌적해졌다. 생리 기간임에도 생리혈이 휴지에 묻어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신기하고 좋다. 활동성이 월등히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패드형 생리대를 사용할 때 생리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질 주름에 고인 생리혈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리컵은 자궁에서 바로 피를 받아내기 때문에 질 주름에 생리혈이 고일 일이 없어 생리 기간도 그만큼 줄었다. 세척하는 일도 면 생리대보다 간편했다. 사용 후 끓는 물에 1~2분 정도 소독해 보관하면 최대 10년 가까이 쓸 수 있다는 점도 날로 비싸지는 일회용 생리대 가격을 생각하면 경제적이다. 

지난 6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가 공개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의 체험담도 이씨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 감독은 인터뷰어에 그치지 않고 직접 생리컵을 사용해본 경험을 영화 속에 녹여낸다. 자신의 머리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화장실에 앉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잠시, 생리컵에 담긴 생리혈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눈앞에 찰랑이는 새빨간 피는 ‘불결함’으로 상징되는 생리혈에 대한 편견을 보란 듯이 부순다. “생리컵 안에 난생처음 보는 새빨갛고 깨끗해 보이는 피가…. 그걸 보면서 왠지 모를 희열? 쾌감? 그런 게 몰려왔어요.”

7월20일 여성환경연대는 ‘생리컵 사용 경험을 통해 본 월경문화 집담회’를 열었다. 집담회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와 함께 진행한 여성 1000명의 생리용품 사용 실태와 생리컵 사용자 50명의 심층면접 결과를 공유했다. 이날 발표에서 ‘생리컵 구입 시 사이즈 선택 기준’을 묻는 질문에 69.8%의 여성이 ‘자궁까지의 길이’라고 응답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이는 생리컵을 사용해본 여성들이 그동안 스스로도 터부시해왔던 생리와 몸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생리컵은 이르면 8월부터 국내에 정식 수입돼 판매될 예정이다. 생리컵을 만들거나 판매하기 위해서는 식약처로부터 의약외품 제조업 허가 및 품목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처음 수입하는 업체는 안전성 허가를 위한 임상실험도 필요하므로 2억원 이상을 투자해야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다. 선발주자 자리를 두고 업체 간 ‘눈치작전’이 치열했다는 후문이다.

온라인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이멘(Hymen:이른바 ‘처녀막’의 의학적 용어)이 훼손된다느니, 걸으면 흥분되겠다느니, 생리컵에 커피 타주는 거 아니냐는 둥 ‘무지한’ 혐오성 댓글이 주를 이뤘다. 댓글을 단 사람의 80%는 생리컵을 쓸 필요가 없는 남성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몸에 대한 주도권을 깨닫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생리컵이라는 생리용품 선택지가 또 하나 늘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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