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파기환송심 재판 막바지에 중요한 증거가 나왔다. 7월24일 검찰은 국정원이 복원한 녹취록(이하 원세훈 추가 녹취록)을 냈다. ‘원장님 지시 강조 말씀’이라는 자료다. 한 달에 한 번씩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이 부서장들을 모아놓고 국정원 기조와 방향을 전달한 녹취록이다.

검찰이 법원에 낸 2011년 11월18일자 원세훈 추가 녹취록 발언을 보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부터 (총선) 예비등록을 시작한다. 지부장들은 현장에서 교통정리 잘 될 수 있도록 잘 챙겨봐야 한다.” “SNS에서 말로 해가지고 누가 믿나? 예를 들어 국사편찬위원장·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명의로 ‘사실이 아니다’ 딱 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러니 우리가 실어 날라주라 이거다.”

발언 당시는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직후였다. 재판부에 이미 증거로 제출된, 같은 날 원 전 원장의 말(“선거 기간 동안 트위터·인터넷 등에서 허위 사실이 유포됐다. 선거가 끝나면 결과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원이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한다”)과 비교해보면 좀 더 적나라한 국내 정치·선거 개입 발언이라 할 수 있다. 2013년 4월 윤석열 검찰 특별수사팀은 당시 국정원을 압수수색했다.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의 비협조로 압수수색에 한계가 많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적폐 청산 작업을 하며 검찰에 원세훈 추가 녹취록을 제출했다.

원세훈 추가 녹취록을 또 다른 자료와 비교해보면 일관된 흐름이 드러난다. 앞서 7월10일, 검찰은 법원에 국정원 문건을 냈다. 〈세계일보〉가 7월9일자에 보도한 2011년 11월 국정원 문건이었다. ‘SNS의 選擧(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 사항’이라는 제목의 보고서 한 대목이다. “野黨(야당)과 左(좌)티즌들이 주요 선거 시마다 SNS 主(주) 이용층인 20~40代(대) 불만 자극과 사실 왜곡에 앞장서며 對(대)정부·여당 이미지 흐리기 도구로 惡用(악용)” ‘좌티즌’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정권에 비판적인 누리꾼을 척결 대상으로 삼았다. 국정원도 내부 문건이라고 인정했다. 7월10일 재판부는 제출된 국정원 문건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그동안 제출된 증거만으로도 판단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그날로 마무리하려 했던 재판을 한 번 더 열기로 결정했다.

ⓒ연합뉴스이명박 전 대통령을 서울시장 재임 시절부터 보좌했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오른쪽)은 트위터와 인터넷에서 ‘좌티즌’을 대상으로 국정원이 심리전을 펼쳐야 한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렇게 해서 열린 7월24일 마지막 공판에서 원세훈 추가 녹취록이 등장한 것이다. 법원은 원세훈 추가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했다. 원세훈 추가 녹취록은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보여주는 여러 발언을 담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꾸준히 국내 정치와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우리 원에서도 하지만 지부에서도 심리전 12국하고 다 연결해서 하고 있지요? 대북 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 꽤 중요하다(2012년 4월20일).”


국정원은 온·오프라인 연계 작업도 중요하게 여겼다. 보수 단체가 보수 언론 광고를 게재해 여론을 조성하면 이를 다시 온라인으로 퍼 나르는 식이었다. 2011년 7월21일 〈문화일보〉 31면에 ‘희망버스’를 비판하는 의견광고가 실렸다. 희망버스는 ‘절망버스’ ‘폭력버스’라며 야당 의원과 지역 주민도 반대한다는 주장이었다. 자유주의진보연합(faa.or.kr이라는 홈페이지 주소는 현재 페이스북 팔씨름 연합이라는 곳으로 연결된다)이라는 단체가 내놓은 내용을 국정원 심리전단이 온라인에서 확대 재생산했다. 2011년 12월28일과 29일 〈조선일보〉 35면에 실린 자유주의진보연합이 의견 광고를 냈다. 모두 국정원 기획이라고 7월24일 검찰은 밝혔다.

“기사 잘못 쓴 매체 없애버리는 공작 해야”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2013년 7월 시작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은 2017년 7월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2014년 9월 1심(부장판사 이범균)은 원 전 원장에 대해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원 전 원장의 핵심 혐의인 공직선거법 위반 부분을 무죄로 판단했다. 박근혜 정부가 가장 민감해했던 ‘정권 탄생의 정통성’ 부분을 정리해줬다는 비판이 법원 안팎에서 제기되었다. 2015년 2월 2심(부장판사 김상환)은 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을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에 대해 징역 3년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하지만 대법원(주심 대법관 민일영)이 파기환송해 서울 고등법원으로 재판을 돌려보냈다. 2심에서 인정한 핵심 증거(‘425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시사IN 이정현

해당 파일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입증해줄 핵심 증거였다. 검찰이 압수한 국정원 심리전단 김 아무개 직원의 이메일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김 직원은 1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해당 메일은 본인만 사용했다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는 첨부파일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용이 생소하다”라고 말했다. 2심 재판부는 해당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검찰 진술, 업무 매뉴얼, 메일 작성 시간과 국정원 IP 등을 고려해 ‘업무상 통상 문서’로 보았다. 


대법원은 이 첨부파일을 업무상 통상 문서로 본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디지털 저장매체로부터 출력한 문서도 작성자가 법정에서 “직접 작성했다”라고 인정해야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 좁게 해석했다. 검찰 특별수사팀은 성매매 고객 정보 기록이 담긴 디지털 문서를 직접 증거로 본 대법원 판례와 상충한다며 대법원의 결정을 아쉬워했다.

2015년 9월부터 시작된 파기환송심은 여러 뒷말을 낳았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시철)는 원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부분까지 모든 쟁점을 다시 심리하겠다고 나섰다.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유죄가 나온 국정원법 위반까지 무죄가 될 수 있다는 취지로 읽혀 논란이 되었다. 검찰은 재판부가 시간을 끈다고 비판했다.

지난 2월 정기 인사를 계기로 재판부가 바뀌었다. 지나치게 길어진 원세훈 전 원장의 재판이 오히려 막판에 새로운 전기를 맞은 셈이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부장판사 김대웅)의 판단은 8월30일 나온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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