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동료와 서울 마포구 포은로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하다 호젓한 카페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여백이 많은 공간 안으로 낮볕이 들고, 몇 개의 나무 테이블과 잎이 넓고 줄기가 긴 식물이 심어진 화분들이 보였다. 카페 통유리 창을 가린 직물 커튼은 그 초록과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그 슴슴한 풍광을 두루 담은 ‘호시절’이라는 카페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시의 이름으로 삼아야지 마음먹었다.

글 쓰며 사는 처지라 아무래도 단어 앞에서 마음을 먹고자 하면 홀연히 낯선 문장이 찾아오고 그 낯선 문장에서 다시 멀고도 가까운 이야기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식물 때문에 호시절을 보낸 어머니가 있고 동물 때문에 호시절을 맞는 아버지가 있으며 그 둘을 먼 곳에 두고 그리워하는 자식들의 호시절이 있다. 이상하지만 어떤 시의 호시절은 시가 되지 않았을 때이기도 하다. 문득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료의 호시절이 궁금해졌고,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 세는 어떻게 내고 사나’ 카페 호시절의 안전이 염려됐다. 포은로는 ‘망리단길’의 본래 이름이다. 요즘 그 길에서 모든 공간은 호시절이기도 하고, 호시절이 아니기도 하다.

ⓒ연합뉴스서울 서대문구 신촌로에 자리한 공씨책방은 개업 기간이 40여 년이나 된 ‘1세대 헌책방’이다. 최근 건물주에 의해 내쫓길 위기에 처했다.

포은로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 일대 공간 임차료가 부쩍 올랐다는 소식, 홍대나 이태원처럼 ‘젠트리피케이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 더는 새삼스러울 게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집세가 너무 올라 오랜 망원동 생활을 접을 예정이라는 친구의 말은 새삼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 말이 곧 내가 사는 동네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서울에선 최소한의 공간적 호사를 누리기도 쉽지 않다. 노원구에 사는 한 친구에게 그곳이 아파트값 상승률 1위 동네더라 하고 소식을 전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올라봤자 이 돈으로 다른 동네 못 가는 게 함정.’ 억 단위의 빚을 지고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한 이가 그 큰돈으로도 갈 수 있는 동네가 없다고 말하는 건 어떤 시절의 보증일까. 쫓기듯 이사하며 사는 가운데도 내 집 마련이 삶의 호시절을 증명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쫓기며 사는 많은 이들의 상상 속에서 삶의 호시절을 보장하는 건 건물주가 되는 길뿐이다.

‘내쫓기다’라는 단어 앞에서 쓰고 엮고자 마음먹은 이들이 있었다.

어떤 공간에 마지막까지 함께 머무르는 일

출판사 유음과 함께 지난 금요일, 신촌 공씨책방에서 ‘현장 잡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면이 아니라) 현장에서, 고작 작은 선풍기 서너 대가 돌아가는 푹푹 찌는 지하실에서, 헌책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30여 명이 함께 헌책을 깔고 앉아 동료 작가들의 새로운 시와 산문과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그렇게
현장에서 한 문학의 동시다발적인 첫 독자가 되어서 우리는 어떤 공간에 마지막까지 머무르는 자가 되어주는 일이 얼마나 문학적인 것인지, 정치적인 것인지, 개인적인 것인지, 공적인 것인지 생각했다. 그때 작가(나)와 독자(우리)는 자본으로부터의 내쫓김에 저항하는 공간의 일속으로 과연 헌책은 호시절이 지난 책일까, 그런 책들을 모아 파는 책방은 헌 공간이기만 한 걸까, 그 시절 우리가 자주 머물렀던 공간은 다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지게 된 걸까 함께 의논해볼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그곳에서, 마포구 포은로에서 서대문구 신촌로까지 걷는 기분으로 〈호시절〉이라는 시를 읽었다.

공씨책방은 회기동 경희대 앞에서 시작해 청계천과 광화문을 거쳐 신촌에서만 25년을 머문, 개업 기간이 40여 년이나 된 ‘1세대 헌책방’이다. 최근 건물주에 의해 내쫓길 위기에 처했다. 학창 시절 내가 자주 가던 책방은 ‘중앙서점’이었다. 주인의 눈치를 보며 서점 한구석에 앉아 낮볕 속에서 책을 읽는 일은 호사였다. 지금도 그곳은 거기 있다. 아직 거기 현재함으로써 호시절인 공간을 생각한다. 그 공간이 오래된 책방이라는 건 혹은 작은 동네 다방이라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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