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 6권을 추가로 입수했다. 안 전 수석이 청와대에 들어간 2014년 6월부터 구속되기 직전인 2016년 10월까지 박근혜 정부의 국정 전반을 쓴 57권 전권을 단독 입수한 것이다(〈시사IN〉 제487호 ‘삼성의 거짓말 앞뒤가 안 맞네’, 제503호 ‘김기춘이 말한 세월호 참사 원인 승객 탈출 기피’, 제504호 ‘51권 수첩에 기록된 적폐의 나날들’ 커버스토리 기사 참조). 안종범 업무수첩은 박근혜 게이트 관련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된 바 있다. 

〈시사IN〉은 또 박헌영 K스포츠재단 과장의 업무수첩 2권을 비롯한 업무 자료를 단독 입수했다. 박 과장은 지난해 1월 K스포츠재단에 입사했다. 그는 최순실씨가 구속될 때까지 최씨의 지시를 업무수첩에 꼼꼼히 기록했다. 이 수첩도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었다. 박 과장은 최순실씨 소유 회사인 더블루케이와 K스포츠재단을 오가며 일한 측근이다. 하지만 그는 박근혜 게이트 이후 공익제보자로 활동을 하고 있다.

ⓒ시사IN 이정현

〈시사IN〉은 단독 입수한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을 비교했다. 법정에 선 박근혜 피고인은 여전히 최순실씨와 공모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재단 설립을 최순실과 의논한 사실이 전혀 없다” “더블루케이가 최순실과 관련되어 있는 회사인지 몰랐다” “최순실이 왜 나를 이렇게 속였는지 모르겠다. 속은 것은 잘못이다”(검찰 조사).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 하나로 일을 했는데 최순실이라는 탐욕스러운 지인 때문에 잘못 엮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4월17일 기소돼 매주 4차례 재판을 받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최순실씨가 일부 인정한 일부 사실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피고인 박근혜의 주장은 사실일까? 박근혜 피고인의 주장은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을 비교 분석해보면 힘을 잃는다. 박근혜·최순실 피고인의 공모와 협조 관계가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종범 전 수석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에서 ‘VIP(박근혜)’의 말을 기록했다. 박헌영 과장은 서울 청담동 더블루케이 사무실에서 ‘회장(최순실)’의 지시 사항을 기록했다. 더블루케이 사무실에서 최씨가 지시한 사업 아이디어를, 하루 뒤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그대로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의논한 사실이 없다”던 피고인 박근혜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16년 1월 중순 K스포츠재단에 입사한 박헌영 과장은 면접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장님’ 앞에 앉았다. 최순실씨였다. 최씨는 첫 만남부터 스포츠마케팅에 대해 말을 하다가, 박 과장에게 “내 이야기를 왜 듣고만 있느냐”라고 지적했다. 바로 받아쓰라고 호통을 쳤다. 박 과장은 그때부터 수첩에다 최씨의 지시를 기록했다(박헌영 과장이 수첩을 땅에 묻었던 까닭 기사 참조).

 

ⓒ정리 김은지 기자, 디자인 최예린 기자

최순실씨는 K스포츠재단을 활용해 전국 5대 거점 사업을 하려고 했다. 전국 거점 지역에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종목별 체육 시설을 짓겠다는 구상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산까지 지원받을 계획이었다. 최씨가 아이디어를 내면 실무자들이 구체적인 안을 짜가는 방식으로 사업이 구체화되었다. 지난해 2월19일 K스포츠재단과 더블루케이 관계자들이 참여한 ‘합동 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2.19 TBK+KSF 회의’(〈그림 1-1〉) 부분으로, 박 과장은 더블루케이를 TBK로 K스포츠재단은 KSF로 줄여 썼다).

최순실씨는 문체부의 ‘K스포츠클럽 활성화 연구용역 제안서’를 ‘5대 거점 연구용역 제안서’로 제목을 바꿔 재단 자체 사업으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5대 거점 중 한 곳으로 꼽힌 하남은 KT 지원 사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또 스포츠협회를 주니어와 시니어로 나눠 연맹을 창단하라고 했다. 여기에는 제주 건설회사(부영)가 도움을 줄 거라고 했다(〈그림 1-1〉). 

그런데 바로 다음 날인 2016년 2월20일 안종범 업무수첩에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016년 2월20일 대통령 지시 사항을 뜻하는 ‘2-20-16-VIP’ 기록을 보자. ‘13. 부영 회장, K-Sport 연결→KT 5대 거점, 사무총장’(〈그림 1-2〉). 박 전 대통령은 13번째 지시 사항으로, K스포츠재단을 KT와 함께해서 5대 거점 사업으로 연결해주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부영 회장’이라는 단어 또한 옆에 적혀 있다. 핵심 키워드만 적어놓은 안 전 수석의 필기 방식이, 박 과장의 기록보다 자세하지 못하지만 주요 내용이 정확히 겹친다.

심지어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을 비교해보면 잘못된 외국어 표기도 똑같이 등장한다. 마치 인용자가 원작자의 논문을 표절하며 오탈자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전재하는 것과 비슷하다. 최순실씨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스포츠 건설회사인 ‘누슬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사업권을 따내는 데 누슬리를 활용할 요량이었다. 최씨는 자신의 회사 더블루케이를 누슬리와 MOU를 맺어 누슬리 코리아로 만들 방법을 모색했다(〈시사IN〉 제479호 ‘스위스 건설사 앞세운 동계올림픽 접수 작전’ 기사 참조). 그 과정이 박헌영 업무수첩에 담겨 있다. 2016년 3월5일 박헌영 업무수첩을 보면 ‘뉴슬리 설명 3.8 미팅 예정 -뉴슬리 사업분야 전시관, 가설부문 설명안’이라고 적혀 있다. 연이어 ‘5대 대구-골프 축구 빼고’라고 썼다(〈그림 2-1〉). 앞서 말한 5대 거점 지역에 대구를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하되 종목은 골프와 축구를 빼라는 지시라고 박 과장은 설명했다. 박 과장은 “NUSSLI는 스위스 회사라, 뉴슬리·누슬리·뉘슬리로 읽을 수 있다. 언론에서는 ‘누슬리’로 주로 쓰던데 내가 최순실씨한테 ‘뉴슬리’로 보고했다”라고 말했다. 바로 다음 날 안종범 업무수첩에 ‘뉴슬리’라는 단어가 똑같이 등장한다. 2016년 3월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보자. ‘3-6-16 VIP 3. 뉴슬리 스위스 -5대 거점 -60억→30억 평창, Nussli -sport facility 건축회사. 하남 1600평 인천, 대전, 대구, 부산. 평창 모듈라(〈그림 2-2〉).’ K스포츠재단은 당시 경기도 하남시를 비롯해 인천·부산·경북(대구)·대전에 엘리트 스포츠 양성소를 세우려 했다. 대한체육회가 보유한 하남 땅 약 1626평(약 5370㎡)에 신규 시설을 지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게 ‘누슬리’를 ‘뉴슬리’라고 표기한 점이다. 원저작자(최순실)의 표기 방식을 인용자(박근혜)가 그대로 따라한 셈이다.

ⓒ연합뉴스안종범 전 수석(위)의 업무수첩과 박헌영 K스포츠재단 과장의 업무수첩 내용이 일치했다.

박근혜·최순실의 지시가 일치한다는 증거는 또 있다. ‘갤러리아포레’라고 한화건설이 지은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있다. 이 아파트도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에 똑같이 등장한다. 2011년 입주를 시작한 갤러리아포레는 2008년 3.3㎡당 평균 분양가 4300만원이었다. 당시 최고 분양가로 화제가 되었다. 2016년 3월27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안 전 수석에게 7번째 지시 사항으로 갤러리아포레 임대가 가능한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3-27-16 VIP② K-Sports →한화 -성수동 지하 갤러리아포레 -임대 가능? 200평 -체육 거점 -국토부 체육시설 임대 가능한 땅’(〈그림 3-2〉)이라고 쓰여 있다. K스포츠재단이 사용하기 위해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갤러리아포레 지하에 200평 정도 임대가 가능한지 알아보라는 뜻으로 읽힌다. 박 전 대통령은 특정 장소를 콕 찍어, K스포츠재단 관련 업무를 위해 청와대 수석에게 임대를 알아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누구한테 갤러리아포레 정보를 들었던 것일까? 박헌영 과장은 “예전부터 최순실씨가 차를 타고 가다가 본 갤러리아포레에 꽂혀서 계속 그곳을 알아보라고 했다. 너무 비싼 곳이라 당시 재단 형편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최순실씨가 엄청 거길 들어가고 싶어 했다. 결국 최씨와 함께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가격이 안 맞아서 못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 외국어 표기도 동일

박헌영 업무수첩에도 갤러리아포레와 관련한 지시 사항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예를 들면, 2016년 4월21일자 박헌영 업무수첩에 ‘내일 갤러리아포레 답사 임대 월 1100/100평(〈그림 3-1〉)’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박헌영 업무수첩에는 ‘갤러리아포레 101동 지하2F 평당 15만원(협의 가능)’ ‘지하 2층만 따로 시행사 운영 中. 지하 1층은 아직 한화에서 매각 X. 통으로 400억’이라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건물을 살펴보고 온 다음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을 비교해보면, 최순실씨가 눈여겨본 건물 임대 문제까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것으로 풀이된다. 그뿐 아니라 박헌영 업무수첩에 ‘GKL 장애인 펜싱 사업’ ‘SK·롯데 등 주요 대기업 지원 요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안종범 업무수첩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하는 부분이 5군데 이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검찰 신문조서를 보면, 검사가 이렇게 물었다. “최순실은 ‘5대 거점 체육인재 육성사업 기획안’을 정호성을 통해 박근혜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위 기획안을 본 적이 없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렇게 진술했다. “본 적이 없다. 최순실한테 K스포츠재단 등 운영을 맡으라 한 적이 없다. 최순실이 그걸 맡아서 한다는 자체가 상상이 안 된다. 최순실이 재단의 이사장이나 이사도 아니다. 나를 돕는 마음으로 좋은 인재 한두 명 소개나 여론 전달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재단의 운영을 최순실에게 맡으라고 한 적 없다. 최순실이 어떤 근거로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안종범·박헌영 업무수첩은 피고인 박근혜의 진술과는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기자명 김은지·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