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도 괴이하다. 그때 나는 왜 따귀를 맞았어야 했을까. 20년 전 일이다. ‘여자 사람 친구’들과 교실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도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정치경제 선생으로부터 느닷없이 따귀를 맞았다. 선생은 술에 취해 있었고, 그의 시각에서 나는 남자 고등학교 교실에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하는 데 여념이 없던 놈이었다. (그러나 설령 그랬다고 한들) 저녁의 교실에서 기골이 장대한 선생으로부터 따귀를 맞고 나뒹굴면서도 나는 도무지 잘못한 바를 알 수 없어서 울음을 터뜨릴 수 없었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온 건 교문 밖에서 가방을 들고 기다리던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였다. 나와 친구들은 학교에서 멀어져가며 점점 알 수 없는 서먹한 기운에 휩싸였다. 이후로 우리는 두 번 다시 함께 앉아 공부하지 않았다. 나는 맞은 자로서 어떤 말보다 행동이 빨랐던 선생의 얼굴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때 그를 그토록 불쾌하게 만든 건 정말 나와 여자 사람 친구들 간의 현실적인 거리였던 걸까.
열한 번째 여성인권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이정곤 감독의 〈윤리거리규칙〉이라는 단편영화를 알게 되었다. ‘50㎝ 윤리거리규칙’이라는 남녀 학생 간 신체 접촉 금지에 관한 교칙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실제로 아직도 전국의 수많은 고등학교에서 이성·동성 교제를 학칙으로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처벌을 받는다.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40보다 먼 60보다는 가까운 접촉의 거리를 상상하고 통과시킨 이들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그린 그림은 어떤 것이었을까.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학생 간의 교제를 ‘통제해야 할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학창 시절 ‘면학 분위기 조성’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말을 들으며 내가 보고 듣고 겪은 일 중 상당수는 면학 분위기보다는 반인권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들이었다. 학교는 신성한 학습의 장이라는 선생들과, 학교는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속된 생활의 장이라는 학생들은 과연 몇㎝나 떨어져 있는 것인지. 느닷없이 따귀를 때리던 학교라는 시스템은 이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술 취한 50대 남자 선생을 그토록 폭력적으로 만든 게 그 자신이 상상한 남학생과 여학생 간의 음란한 거리였음을 떠올려볼 때 다음과 같은 소식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청소년은 쾌락적이어서는 안 되는가
청소년만을 위한 콘돔 자판기를 설치한 섹슈얼 헬스케어 업체 ‘이브(EVE)’와 함께, 한 고등학생이 일부 콘돔을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쾌락통제법’ 폐지를 위한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청소년이) 성관계를 할 때 피임을 할 것인지,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성적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는 것. 청소년들은 피임할 수 없는 존재인가. 청소년들은 쾌락적이어서는 안 되는가. 쾌락과 음란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성폭력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이성 친구와 단둘이 집에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가르치는 지금의 성교육 표준안으로 과연 고민할 수 있을까. 임신한 여자 선생을 ‘콘돔 없이 하는 섹스’ 판타지의 대상으로 삼는 학생과 또래 애인과의 성적 만족을 위해 요철 콘돔을 사용한 학생 중에 현실적으로 음란한 쪽은 누구일까.
20년 전 나는 상상할 수 없었으나, 남녀 학생 간 신체 접촉 금지 교칙을 바꾸기 위해, 보란 듯이 50㎝ 자를 들고 다니며 거리 유지에 최선을 다하고, 앞다투어 동성 간 교제를 지지하며, 선생들 간의 윤리거리규칙을 촉구하기에 이르는 학생들의 ‘대환장’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 극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청소년들이 미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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