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부산에서 〈조선일보〉가 창간된다. 오늘날의 〈조선일보〉와 아무 상관없는, 일본인 발행인과 편집인이 만든 일본어 신문이다. 이 〈조선일보〉는 곡절을 거쳐 1907년 〈부산일보〉로 완전히 몸을 바꾼다. 이 역시 광복 후 창간되어 오늘에 이른 〈부산일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신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일보〉는 야망이 있는 신문이었다. 대구에 지사를 두고, 경성·진주·목포·울산·마산·진해·대전 등에 지국을 두더니 차차 몸집을 불려 1940년대에는 일본·만주국·중국 본토를 아울러 총 116개 지사 및 지국을 개설하기에 이른다. 부산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하카타를 관문 삼아 오사카와 도쿄로 뻗고, 봉천(현 선양)과 신경(현 창춘)과 대련과 간도를 아우르고, 중국 본토에서 베이징과 상하이에 이른 정보망을 구축한 것이다.

이른바 ‘남선(南鮮)’이었다. 조선 남부를 안방 삼아 열도와 만주와 대륙을 아우르겠다는 속셈 아니겠는가. 일본제국을 영원한 제국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발행과 광고도 착실했다. 그간의 연구에 따르면 〈부산일보〉는 1938년 일본제국 전체 신문사를 통틀어 광고 수주에서 28위에 든 신문사였다.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영향력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조선어 언론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도 〈부산일보〉를 앞서지 못했다. 더구나 뜻밖의 음식 문헌이 깃든 귀중한 사료이다.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고문헌실 제공1931년 1월3일자 〈부산일보〉에 실린 광고.

발행자도 편집자도 독자도 일본인이다. 그러니 한반도 남부 거류 일본인을 향한 ‘고향의 맛’ 광고가 깃들이게 마련이다. 일본 장(醬)인 쇼유, 쓰유와 사케는 기본이다. 아지노모토도 빠질 수 없다(1908년 일본인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세계 최초로 MSG 합성에 성공했다. 이듬해인 1909년 MSG는 아지노모토라는 상품명으로 일본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부산일보〉 1931년 1월3일자 전면을 차지한 아지노모토 광고(그림)를 보자. 조선어 언론에 아지노모토 광고를 낼 때에는 요리하는 주부와 그 음식을 받아먹는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런데 일본인을 향해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 다른 기획을 내밀었다. “더욱더 해외로 웅비해 산업 발전을 이뤄 조금이라도 산업 보국에 이바지하겠다. 바라건대 계속해서 후원해주길.” 


일본의 자부심을 한껏 추어올린 광고 기획

저 아지노모토 상자를 탄약 상자로 바꿔치기하면 그대로 전쟁 선전물로 재활용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상자를 나르는 노동자의 팔뚝에는 힘이 넘치고, 얼굴은 가뿐한 기색이다. 광고에 따르면 ‘결정적으로 맛이 좋고’ ‘경제적이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가장 뛰어난 조미료’이다. ‘세계 유일’의 일본산 조미료가 해외로 뻗어 나가는데 어찌 일본인이 신나지 않겠는가. 제국의 자부심을 한껏 추어올린 광고 기획이었다. 이들 광고는 말했다. 중국·유럽·미국 등 전 세계의 가정이 아지노모토를 기다린다고. 아지노모토를 실은 수출 선박은 한 시대의 ‘보물선(寶船)’이라고.

여기 이르면 미각의 문제가 오로지 입속의 쾌락뿐이 아님을 다시 생각한다. 아지노모토는 조선인에게 엄마의 손맛과 냉면과 김치와 신선로를 내밀었다. 그리고 일본인에게는 해외 웅비와 산업 보국과 세계 유일을 강조했다. 제국의 영광과 미각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제국 덕분에 으쓱한 제국의 신민은 입맛까지 다시는 지경이 되었다. 한 연구자는 아지노모토를 일러 ‘제국의 맛’이라고 했다. 메이지·다이쇼·쇼와 연호를 박은 〈부산일보〉 속 아지노모토 광고를 보며 제국의 맛을 실감한다. 실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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