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6일,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의 당선 일성은 ‘화합’이었다. 바른정당은 현재 소속 국회의원이 단 한 명만 이탈하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잃게 된다. 위태로운 처지에서 그는 2위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득표율로 당 대표 자리에 올랐다.

그로부터 3주째, 바른정당의 표정은 밝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사이 바른정당은 지지율도 오르고, 사람도 모이고 있다. 7월13일에는 MBN과 TV조선 앵커를 지낸 박종진씨가 인재 영입 1호로 입당했다. 박씨는 “바른정당이 똘똘 뭉쳐 믿음을 갖고 행동하면 내년 지방선거와 3년 후 총선에서 1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의 발언은 그의 영입에 공을 들인 이혜훈 대표의 바람과 맞닿아 있다. 이 대표는 틈날 때마다 “새로운 보수의 가치를 앞세워 바른정당을 보수의 본진으로 만들겠다”라고 강조해왔다.

ⓒ시사IN 신선영이혜훈 바른정당 대표는 자신이 추구하는 보수 정치의 가치를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진영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매카시즘을 반대한다.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이 시장경제의 핵심이다”라고 요약했다.

그렇다면 이 대표가 말하는 새로운 보수란 무엇일까? 이 대표가 걸어온 길과 정치권에서 그가 경험한 인사들에 대한 평가를 경청하면 얼추 그림이 그려진다. 인터뷰 가운데 비중 있게 등장한 진보 인사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었다. 맥락을 보면 이 대표가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의 경제관도 읽힌다.


이명박 이혜훈 대표는 취임 후 가장 먼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찾았다가 누리꾼의 입길에 올랐다.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등 이명박 정부 주요 정책에 대해 비판할 때는 언제고 대표 되자마자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느냐는 힐난이었다. 이 대표는 “전직 대통령이나 영부인들을 다 예방코자 연락했는데 가장 먼저 스케줄이 잡혔을 뿐이다. 저랑은 워낙 사이가 안 좋은 분이라 제 딴에는 화합의 의미였는데 그 사정을 잘 모르는 기자 분들이 거꾸로 보셨다”라고 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대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친이계한테 가장 많이 고발당했다. 당시 박근혜 후보 대변인을 맡아 이명박 후보를 날카롭게 공격한 것이 이유였다. 이런 악연으로 2008년 총선 때는 공천을 거의 못 받을 뻔하다 마지막 날 마지막 순번으로 받았다. 당시 공천심사위 주변에서는 딱 한 명 들어간 친박계 심사위원이 이혜훈 공천을 반대하는 친이계 실세의 멱살을 잡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어렵사리 공천을 받은 이혜훈 대표는 이명박 정부 내내 여당 내 쓴소리 담당이었다. 그는 바른정당 대표가 된 지금도 이명박 정부 시절 의혹이 남은 부분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바른정당 안에 친이계 인사들이 주로 포진해 있다는 게 이 대표에겐 제약이 될 수도 있다.

박근혜 2008년 총선 때 이명박 정권의 칼날을 피한 이혜훈 대표는 어이없게도 주군(박근혜)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2012년 총선에서 공천권을 쥐고 있던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이 이혜훈 대표의 지역구인 서울 서초갑에 검찰 출신 김회선 전 국정원 2차장을 공천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혜훈 대표는 본선보다 훨씬 치열했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후보 대변인이자 서울시 선대위원장을 맡아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을 지낸 탓에 서울시 48개 당협위원장(지금은 49개) 대부분이 친이계였고, 이혜훈 대표 혼자 친박 현역이었다. 당시 이 대표가 당한 핍박과 설움은 야당 위원장이 겪는 그것보다 더 심할 지경이었다.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혜훈 대표를 배제한 것이다. 이 대표는 그 이유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쓴소리와 ‘문고리 4인방’의 견제 때문이었다고 본다(이춘상·정호성·이재만·안봉근. 이춘상 보좌관이 2012년 대선 유세를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렸다). 다음은 이 대표가 털어놓은 ‘멀박(친박이었다가 멀어진 사이)’이 되기까지의 사연이다. 

“2007년 경선 패배 후 ‘대통령이 되려면 이러저러하게 하면 안 된다’ ‘잠시 휴지기니 이때 고치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경선 과정에서 지켜본 박근혜 후보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서 나름 고언을 한답시고 한 건데 그게 화근이었다. 주변에서는 입바른 소리 하면 찍힌다고 말렸는데, 내 생각에는 안 고치면 대통령 되기 힘들고, 되면 더 큰 문제였다.”

핵심은 문고리 4인방이 쌓아올린 철옹성이었다. 그 철옹성이 당시에도 정치인 박근혜를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차단시켰고, 이 때문에 친박계 내부에서도 불만이 높아갔다.

“박근혜라는 사람은 휴대전화와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정치인이다. 그러다 보니 옆에 있는 4인방 중에 한 명(주로 안봉근)이 전화를 바꿔줘야만 연결되었다. 5선이나 6선을 하고 당 대표까지 지낸 분들도 늘 어린 친구에게 전화 연결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한번은 한 최고위원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한테 왔다. 북한에서 포격이 있었던 날인데, 이럴 때 ‘박근혜 의원이 이런저런 멘트를 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하고 싶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섯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 끝내 연결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불만이 팽배해지고 실제 박근혜 곁을 떠나는 경우도 있길래 ‘이 친구들을 뒤로 물렸으면 좋겠다’ ‘대구 달성에서 처음 보궐선거에 나올 때 급조한 친구들이라던데 대통령 되려는 사람을 보좌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는 얘기들을 했는데, 돌이켜보면 철옹성에 머리를 박은 격이었다.”

박근혜 후보가 늘 ‘발신자 표시 제한’ 전화를 쓰는 것도 이혜훈 대표는 불편했다. “자기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정치 생명을 거는 전우들에게도 ‘너한테 내 폰 번호는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잖은가. 아, 같이 갈 수 없는 분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서서히 ‘멀박’이 되어 공천까지 못 받은 이혜훈 대표는 2012년 봄 최고위원에 선출된 후에는 경제민주화 공약을 관철하는 데 집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근혜는 그래도 자기가 입 밖에 낸 약속만은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믿고 있던 터라 어떻게든 경제민주화를 대선 공약에 넣으려 기를 쓴 것이다. 경제민주화실천위원회를 만들고 김종인 비대위원과 공조를 통해 여론도 조성했다. 결국 박근혜 후보가 전국을 다니며 경제민주화를 약속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박근혜 당선자가 표변했다. 그때부터 이 대표도 “왜 경제민주화 공약을 지키지 않느냐”라며 다시 쓴소리를 강하게 냈다. 그랬더니 최고위원을 하는 동안 두 번이나 청와대의 핵심 실세가 전화를 걸어와 사실상의 최고위원 사퇴를 종용했다. ‘자리’를 제안했는데, 전공도 맞지 않은, 모욕으로 느껴지는 자리였다. 게다가 그 자리로 가면 당적을 가질 수 없어서 최고위원을 내놓아야 했다. 여러 번 거절했더니 박근혜 청와대의 실세가 몹시 짜증을 냈다. 정치인 박근혜와는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이혜훈 대표는 박근혜 탄핵 과정과 태극기 집회를 보면서 보수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정리했다. “태극기 집회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들은 그걸 보수라고 믿고 있다. 자기 삶의 궤적에서 본능적으로 빨갱이는 안 된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분들이다. 이분들의 묻지 마 지지가 박근혜 지지율을 떠받쳐왔다. 최순실 사태가 없었으면 어땠을까 참 소름 끼친다. 이럴수록 제대로 된 보수 정당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이 강해진다.”


유승민 이혜훈 대표의 정치적 멘토는 단연 유승민 의원(전 바른정당 대선 후보)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7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 8월 미국 유학을 앞두었던 이혜훈 대표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잠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다. 그때 연구위원이던 같은 과 선배 유승민 의원을 만나 6개월간 연구조교 노릇을 했다. 1996년 귀국 후 KDI 연구위원으로 입사하면서 유 의원과 재회했다. 그사이 이혜훈 대표는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고 미국 랜드연구소 연구위원과 영국 레스터 대학 경제학과 교수를 거친 후였다. 이 대표는 유승민 의원과 자신이 추구하는 경제정책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연합뉴스7월13일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와 주호영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박종진 전 앵커(가운데) 입당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정치권과의 인연은 2000년 2월 유승민 의원이 당시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 발탁되면서 시작됐다. 유승민 의원의 부친이 국회의원(유수호 전 의원)을 지냈고, 이혜훈 대표 역시 시아버지가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김태호 전 의원)이었지만 두 사람이 직접 정치를 경험한 것은 이때부터다.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아 그해 총선에 참여한 유승민 의원은 KDI 후배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정책지원팀을 조직했고, 이혜훈 대표는 이 팀에서 리포트를 쓰며 도왔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혜훈 대표가 먼저 국회의원 공천을 신청했다 탈락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대표는 2002년 7월 “내 아들은 천생 학자이고 정치는 며느리가 잘할 것”이라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유지를 받들어보겠다고 덜컥 공천 신청서를 냈다. 당시 면접도 못 가보고 서류 심사에서 떨어졌다. KDI에 사표를 던졌던 이 대표는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그런 참에 이회창 후보 특보 자리를 주선한 이도 유승민 의원이다.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 실패하고 이혜훈 대표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잠시 소원했던 두 사람은 2004년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끈 총선에서 각각 비례대표와 지역구(서초갑) 의원으로 국회에서 입성했다. 둘은 본격적으로 동지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친박을 거쳐 탈박·멀박의 길을 걸었고, 박근혜 게이트가 터진 후에는 바른정당을 창당해 각각 대선 후보와 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혜훈 대표는 유승민 의원이 굉장히 냉철한 스타일, 감성적이기보다 이성적인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이 대표는 “우리가 민주화도 되고 산업화도 안정적인 반열에 오르고 했으니 이제는 좀 이성적이고 냉철한 지도자가 나올 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홍준표 당분간 ‘맞짱’을 자주 뜨게 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이혜훈 대표는 인연이 색다르다. 2004년 공천을 받을 때 일이다. 당시 이 대표는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당의 공천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이라고 밝힌 이한테 전화가 왔다. “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아 천막당사를 운영하는 등 힘든데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경제통에 젊은 여성’을 찾고 있다. 거기에 딱 맞으니 비례 대신 서초갑에 나가는 게 어떠냐”라는 내용이었다. 이 대표는 마산이 고향인 데다 서울에서는 마포에 살고 있던 터라 “서초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른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전화로 처음 통화를 한 이 남자가 바로 “마산 가스나네. 대학 올 때 뭐 타고 왔노?”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얼결에 “버스 타고 왔는데요” 했는데 “그럼 고속터미널에서 내렸겠네? 거기가 서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남자가 바로 홍준표 대표다.

이 대표는 앞으로 홍준표 대표의 막말 정치에 아예 대꾸를 안 할 작정이다. 대신 바른정당이 하고 싶은 정치를 큰 소리로 꾸준하게 설파하며 저변을 넓혀갈 작정이다. 이 대표가 추구하는 보수 정치는 이렇다. “첫째,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진영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보가 절대 악도 아닌데 무조건 반대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둘째, 매카시즘을 반대한다. ‘문재인이 집권하면 김정은이 집권하는 거다’ 식의 종북몰이 말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철통같이 지켜내는 안보에만 집중하겠다. 셋째,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이 시장경제의 핵심이다. 그동안 시장만능에 빠져 재벌들의 횡포 따위를 용인하다 보니 양극화가 심해지고 대한민국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걸 방조하는 건 오히려 보수의 적이다. 재벌 개혁이 오히려 개혁 보수의 길이다.”


김상조 같은 맥락에서 이 대표는 요즘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에 적잖은 기대를 하고 있다. 정치권에 발을 디딘 이유 중 하나가 “말도 안 되는 경제 적폐”를 바꿔보고자 함이었는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요즘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독과점이 너무 많다. 치킨만 해도 3사가 장악하고 가격도 천편일률적으로 올리는데 담합으로 처벌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더 화나는 건 기술 탈취, 하청업체 납품단가 후려치기, 탈세·공금횡령·배임 등으로 유죄확정을 받은 재벌 총수들이 웬만해서는 감옥에 가질 않는다. 보수 정당이라는 사람들은 돌격대처럼 재벌을 대변한다. 이런 거 고치려고 국회 기재위도 못 떠나고 있었는데, 이번에 공정위원장이 치킨 3사의 담합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하자마자 가격을 내리겠다 해서 얼마나 기쁘던지. ‘황금 올리브 치킨’이 2만원을 넘는 건 정말 열받는 일 아닌가?”(웃음)

ⓒ연합뉴스2009년 4월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조윤선 대변인(왼쪽)이 얘기를 나눈 후 웃으면서 자리에 앉고 있다.

조윤선 이 대표는 2016년 공천을 앞두고 조윤선 전 장관과 경선 혈투를 벌였다. 원조 서초 출신임을 앞세운 조 전 장관이 ‘보수 표밭이 좋은 곳에 같은 사람을 세 번씩이나 공천을 주면 안 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두 사람은 이회창 전 후보의 특보와 대변인으로 처음 인사를 나눴다. 한때 친박도 함께했다. 그러나 한 명은 쓴소리를 이어가다 팽당했고, 다른 한 명은 청와대 수석, 장관 등 핵심 측근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다 구치소에 함께 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대표는 조 전 장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어떤 질문에도 시원시원하게 의견을 밝혔지만, 감옥에 간 동료에 대해 말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는 듯했다. 다만 박근혜·조윤선 사례가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편견을 굳히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가 지켜본 두 사람은 정치를 공적인 과정이 아니라 사적 관계로 여기는 측면이 강했다.

기자명 이숙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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