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150일 된 갓난아기부터 할아버지·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한데 모였다. 사회를 맡은 장하나 전 의원(40)이 기자회견을 시작하며 “(기자회견) 첫 참가인 경우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30여 명 대부분이 손을 올렸다. 6월21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비영리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이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칼퇴근법과 보육 추경의 6월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 제목은 ‘국회야 일 안 하고 뭐 하니’였다.

제각각 유모차를 끌거나 아기 띠를 맨 엄마와 ‘보노보노’ 캐릭터 머리띠를 한 영유아가 국회의사당 앞에 섰다. 보노보노 캐릭터에는 ‘나의 소원은 엄마 아빠 칼퇴근’이라고 쓰여 있었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이 ‘보’육과 ‘노’동의 문제가 맞물려 있다며 직접 만들어온 소품이었다. 드물게 보이는 성인 남성 4명은 아빠나 친정아버지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들 손에는 ‘바보야 문제는 칼퇴근이야’ ‘야 3당 보이콧 철회하고 민생법안 예산 심의하라’라고 쓰인 팻말이 들려 있었다.

“20대 국회의원 300명의 평균 재산은 41억원, 평균연령은 55.5세 그리고 83%가 남성이다. 그들은 민생이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인 동시에 엄마라는 두 글자의 무게를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 우리 엄마들은 이곳 국회의사당 앞까지 왔다. 아이를 둘러업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남편과 함께 이 자리에 섰다.” 조성실 공동대표(31)가 읽은 기자회견문에는 이들이 땡볕에 아이들을 데리고 국회 앞까지 찾아온 이유가 담겨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가 겪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이 참거나 극복해야 할 게 아니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당사자 정치를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정치’가 거창한 게 아닌 내 삶을 변화시키는 행위라고 이해하기에, ‘정치하는 엄마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사IN 신선영‘정치하는 엄마들’ 회원들이 아이와 남편과 함께 6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칼퇴근법과 보육 추경의 6월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아기 띠에 넣어온 발언문을 읽은 권미경씨(34)는 남편과 함께 각각 4개월과 26개월 된 딸을 품에 안고 국회 앞으로 왔다. 평일 오전, 온 가족이 출근길의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기자회견을 올 만큼 자신이 절박한 이유에 대해 권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나치게 엄마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육아 시간을 분담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아빠에게, 사회에서는 믿을 수 있는 보육시설에 나누자고 제안한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육아를 하지도 못하는 아빠들을 가정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보육시설의 질적 부분을 개선하고, 보육정책에 엄마의 시선이 반영되어야 한다.”


딸과 손녀를 따라온 심공순씨(62)도 즉석에서 발언을 했다. “36년 전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꿈과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그때의 내 삶과 지금 우리 딸이 겪는 시간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끝내야 한다.” 심씨의 남편 남궁태씨(64)도 기자회견 자리를 지켰다. 그는 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딸을 위해 육아를 돕지만, 제도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너무 힘들다는 것을 체감했다.

기자회견은 지난 6월11일 창립한 정치하는 엄마들의 첫 공식 행보이기도 했다. 장하나 전 의원이 〈한겨레〉에 기고한 글이 계기가 되었다. 의원 임기 중 아이를 낳았던 장 전 의원은 ‘티내지 않는 육아’를 지향했다. 동료 의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육아와 의정 활동을 동시에 해낸 전쟁 같은 2년을 돌이켜보니 후회가 컸다. 의원 시절 엄마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 이슈로 부각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강하게 들었다. ‘엄마들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싹텄다. 장 전 의원은 이러한 생각을 나누는 엄마들끼리 만나자고 제안했다. 페이스북 페이지(facebook.com/political.mamas)도 만들었다.

첫 모임에서부터 큰 위로를 받았다. 육아를 하며 느낀 고립감과 고됨, ‘맘충’으로 대표되는 혐오의 시선 등을 겪으며 느낀 감정을 토로했고 의견을 나눴다. 서로 울고 웃었다. 공감의 시간이었다. 감정 해소만 하고 넘어가기엔 문제가 여전하며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모임에서 조은아씨(45)가 말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끔찍했다. 1972년생인 내가 겪은 상황과 10년 후배들이 겪은 상황이 똑같았다. 큰딸이 대학생인데 더 이상 반복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모임에 나왔다.” ‘알파걸’로 대표되며 학창 시절과 취업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자리를 잡은 ‘82년생 김지영’들도 결국 출산과 육아의 문턱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되새겼다.

이들은 엄마에게만 내맡겨진 보육의 현실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만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직접 나섰다. 공동대표 장하나 전 의원은 당사자 운동이라는 점에서 ‘정치하는 엄마들’의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만남이 대화·공감·위로로만 끝날까 봐 걱정했다. 이제는 엄마들이 정치 세력화되어서 당사자가 직접 문제를 바꿔나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임에 나온 엄마들의 문제의식도 나와 같았다.”

가족이 함께 육아할 수 있는 환경 조성돼야

문제의식의 공감은 단체로 이어졌다. 주축은 아이를 낳고 기른 30대 전후 여성들이다. 디자이너 엄마는 로고를 만들고, 기자 엄마는 보도자료를 썼다. 시민활동가 엄마는 정관을 만들었다. 보육정책을 엄마의 시선에서 살피고, 국정자문기획위원회 산하의 대국민 정책제안 기구인 광화문 1번가에 직접 정책을 제안했다. 이들은 있는 정책도 잘 쓰지 못한다는 지적도 했다. 육아휴직 기간 연장과 육아휴직 급여 인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현재 여성의 육아휴직률은 41.4%, 하지만 민간 기업(34.5%)과 비정규직(1.9%)은 평균에도 못 미친다. 또 일상적으로는 장시간 노동 부담에서 벗어나야 ‘독박 육아’를 막을 수 있다. 이들이 문재인 대통령 공약인 칼퇴근법 통과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다. 보육은 결국 노동시간을 어떻게 줄이느냐는 이슈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엄마들은 피부로 안다. 한 아이가 자라는 데 물리적으로 드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 이를 누군가 ‘독박’을 쓸 때 문제가 터진다. 가족이 함께 육아를 할 수 있는 노동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칼퇴근법은 지난 대선 당시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공감한 법안이다. 출퇴근 시간 의무기록제 도입으로 눈치 야근을 없애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정치하는 엄마들 기자회견에 나온 두효순씨(59)는 “손자 두 명을 키우다 보니 칼퇴근법 제정을 간절히 바란다. 할머니들끼리도 등수를 매긴다. 제일 빨리 퇴근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1등, 공무원이 그다음이다. 제일 꼴찌가 밤 10시, 11시는 되어야 퇴근하는 대기업 다니는 자식들이다. 제시간에만 퇴근해도 서로 육아를 나눠 하기 괜찮다. 정치하는 엄마들이 나서서 이 법이 꼭 통과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엄마 정치가 곧 할머니 정치이고 또 할아버지 정치이며 아빠 정치라는 뜻이다. 누구의 일도 아닌 모두의 일이었던 보육에 대해 ‘82년생 김지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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