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6월12일 밤. 이렇듯 단기간 내에 발표된 훌륭한 음악들을 잠시 뒤로하고, 머리나 식힐 겸 책을 펼쳤다. 〈작가란 무엇인가〉는 잡지 〈파리 리뷰〉가 위대한 소설가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애정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특별히 존경하는 필립 로스 등의 인터뷰를 쭉 보다가 도리스 레싱 인터뷰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에 눈길이 머물렀다. 오늘은 바로 이 에피소드에 대한 단상을 써보려 한다. 위에 언급한 뮤지션들과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혹시 제인 소머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간단하게, 제인 소머스는 도리스 레싱이 짧은 기간 사용한 필명이었다. 도리스 레싱은 제인 소머스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자신임을 밝히지 않고 책을 세상에 공개하려 했다. 어떤가. 어떤 과정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그리고 결말은 어땠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적시해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출판사가 거들떠도 안 봤다고 한다. 도리스 레싱에 따르면, 원고는 ‘생색을 내면서 무시하는 투’로 쓰여 있었는데, 이른바 전문가들 역시 전혀 추측해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원고는 도리스 레싱의 초기를 연상케 하는군요”라고 되물은 한 출판사 사장이 예외였을 뿐이다.
이 외에 도리스 레싱은 “방금 원고를 받았는데, 당신이 좀 도움을 준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받고는,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정체를 기쁘게 알렸다고 한다. 아, 도리스 레싱에게 “그게 나예요”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그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이런 걸 보통 진짜배기 안목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모든 작가가 전문가에게 갇혀 있는 건 아닐까?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건 당연히도 이 문장이었다. “전문가들은 전혀 추측하지 못하더군요. 모든 작가가 이런 전문가들에 의해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대답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지.” 웃기는 상상이지만, 어떤 탁월한 뮤지션이 커튼 뒤로 숨은 뒤 전혀 다른 이름으로 음악을 발표하는 광경을 그려본다. 만약 목소리에 개성이 뚜렷하다면, 자신이 창조한 음악에 맞춤한 대체 보컬을 구하면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뮤지션 중 한 명을 예로 들어본다. 검정치마가 이런 식으로 음악을 공개했다고 치자. 과연 나는 지난 연재에 찬사를 적은 것 그대로 그 음악을 향해 박수를 보내게 될까.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데 나만은 아닐 것이다. 비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양하고, 심지어 가변적이다. 아티스트의 이름값에 취할 수도 있고, 음악을 듣는 시간이나 당시의 기분도 무의식적으로 반영되곤 한다. 비단 음악 평론만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평가하고 평가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니까. 이 숙명과도 같은 굴레가 때론 무겁지만, 조금이라도 더 섬세한 안목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애정일 거라고 생각한다. 저들 역시 애정을 갖고 제인 소머스의 작품을 바라봤다면, 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혹평을 날리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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