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시민+복지 기획위원회 엮음 산책자 펴냄
“현 단계 미국 금융자본주의는 대외적으로 자유화된 세계경제를 볼모로 잡음으로써 자국 내부 경제 조정의 필요를 회피하고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는 인질범 경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중략) 미국 금융자본주의는 또한 국민들이 부채로 소비하게 만들고, 이같은 부채에 근거한 소비를 미국 및 세계경제의 경기 변동에 강하게 연결시켜놓았다. 문제는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같은 거대한 부채를 최종적으로 책임질 경제주체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미국 금융자본주의는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커다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1쇄가 지난 8월8일에 나왔지만 새삼 지금 다시 펼쳐 보는 것은 위와 같은 대목 때문이다.(장진호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책 제목만 보고 ‘웬 철 지난 좌파 타령이냐’ 힐난하지 말자. 이 책은 한국적 사회민주주의를 모색하기 위한 정책적·실천적 모색의 결과이며, ‘진보 세력 내부의 도그마를 해체하는 데 나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야말로 새롭고 생산적인 보수-진보 구도를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는데, 대체로 1부는 사상·역사적 내용이고 2부는 대안·정책적 내용이다. 이 가운데 아무래도 2부에 더 눈길이 가고 그 가운데에서도 최병천의 글 ‘토종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한국판 계급동맹 시론’이 눈길을 잡아끈다. 최병천은 소선거구제 아래에서 전국적·계급적·중앙정치적 이슈가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지역과 동네의 이해관계가 부각될 수밖에 없으며, 지역과 동네 정치의 주요 표적 집단은 자영업자·전업 주부 그리고 어르신(60세 이상 비경제활동 인구)이다.

‘선 복지 확대, 후 조세 확대’ 원칙 제안

최병천은 이들의 인구가 줄잡아 1530만명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식 복지국가 수립에서 이들을 ‘전략’ 차원에서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주거 공간의 지역적 배치는 유권자의 집단적 재편 전략, 진보적 공간 거점 마련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공전세 정책의 획기적 확대다. 대략 5000만~1억원대의 전세에 사는 인구의 주거 안정을 위해 66~99㎡ 규모의 대규모 공공전세 단지 조성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뉴시스〈한국 사회와…〉는 국가가 먼저 질 높은 복지 혜택을 모든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세은과 이상이가 쓴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재정 및 조세제도 개혁의 모색’도 주목해야 한다. 결론부터 살펴보면 이들은 ‘선 복지 확대, 후 조세 확대’ 원칙을 제안한다. 국가가 먼저 선진국 수준의 매우 질 높은 복지혜택을 모든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 빈민과 저소득층만이 아니라 중위 소득층 대다수 국민에게 보편적 복지국가의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복지국가가 자신의 인생과 행복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만 조세 수입 확대 방안의 필요성을 이해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적자 재정이 불가피하지 않은가? 그렇다. 당분간은 조세수입 확대보다 국채 발행 등으로 충당하고 균형재정 원칙은 유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글쓴이들은 주류 시장주의 또는 자유주의 학자와 경제 관료가 재정 적자가 나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고 꼬집는다. 우리나라는 상당 기간의 적자재정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으며, 경제성장으로 선순환되는 역동적 복지인 경우 결국 조세수입을 증가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정치적 견해나 정책 대안이 모두 ‘올바른’ 방향과 내용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정책 이슈이자 담론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딱딱하고 어려울 것 같은 첫인상과 달리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비교적 평이하게 논한다는 점도 이 책의 큰 미덕이다.

기자명 표정훈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