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정치학자 43명이 영국 런던에 모여 포퓰리즘에 관한 일반 이론을 정립하려 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인 얘기가 있다. 또 〈미국의 반지성주의〉(교유서가, 2017)를 쓴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다들 포퓰리즘을 논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정의하지 못한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는 신빙할 만한 정보도 있다. 한국 정치학자로 1988년 포퓰리즘에 관한 최초의 연구 논문을 쓰고 〈포퓰리즘〉(책세상, 2008)을 내기도 한 서병훈은 ‘도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다’라는 노자의 말까지 빌려와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모든 것이 과장이 아니라면,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그가 말하는 ‘국민’ 안에 내가 들어갈까〉(마티, 2017)는 불가능한 개념 정의에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Populism)에 ‘민중주의’ 또는 ‘인민주의’라는 성격을 부여하려는 학자들은 포퓰리즘으로부터 지배 엘리트에 저항해 직접민주주의를 탈환하려는 인민들의 열망을 읽는다. 이들은 선거로 뽑힌 엘리트 정치인과 침묵하는 인민이라는 대립 구도를 세워놓고, 정치 엘리트에게 장악된 민주주의를 교정하는 장치로 포퓰리즘을 용인한다. 반면 단순하고 조야한 정치적 논리와 감성에 취약한 대중 운동을 미심쩍어하는 논자들은 ‘대중 영합주의’나 ‘대중 선동 정치’를 경계하거나 비난하는 용례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예로 든 긍정과 부정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의는 해답 없는 일진일퇴를 되풀이해왔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쓴 얀 베르너 뮐러는 포퓰리즘이 보통 사람들의 정치이자 일반 국민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자유민주주의를 되찾아오려는 노력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반박한다. 지은이는 “엘리트에게 무시당하는 ‘침묵하는 다수’를 선거로 뽑은 정치인에 대립시킴으로써 민주주의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관념은 허구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로운 생각”이라면서, 포퓰리스트의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포퓰리스트라면 엘리트에 반대하는 동시에 항상 다원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기들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자신들이 야당일 때는 다른 정치적 경쟁자들을 부도덕하고 부패한 엘리트의 일부로 몰고, 일단 집권하고 나면 정당한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포퓰리스트의 핵심 주장 속에는 포퓰리즘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자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국민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포퓰리즘의 핵심 주장은 반다원주의를 설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주장에 헌신하지 않는 정치행위자는 포퓰리스트가 아니다.”

얀 베르너 뮐러가 이 책에서 번번이 강조하고 있는 ‘포퓰리스트=반다원주의자’ 공식은, 우리가 포퓰리즘의 특징으로 숙지해왔던 목록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되뇌어온 목록은 이런 것이다. 포퓰리즘은 정책의 장기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유권자 지지 획득이라는 단기적 이익만 생각한다, 포퓰리즘은 제3세계 민중의 근대화와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나 원한이 분출한 것이다, 포퓰리즘은 모든 계급을 ‘다 같은 인민’이라는 관념으로 고취시킨다(그러나 실제는 ‘다 같은 인민’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시민과 정치인 사이에서 매개자 구실을 하는 정당을 생략하고 지도자와 시민을 직접 연결한다 등등.

포퓰리즘은 방금 거론한 목록을 특성으로 갖고 있지만, 그 본질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국민”이며 정치 세계에는 “단 하나의 공동선만 존재”한다고 믿는 “도덕적으로 순결한 국민”의 존재다. 반이슬람과 반이민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유럽의 극우 정당과 백인 우선 국가를 만들려는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바로 포퓰리스트다. “포퓰리즘은 정치 세계를 독특하게 도덕적인 방식으로 상상하며 유일하게 자기들만 국민에 대한 도덕적 대표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촛불의 전부였거나 촛불 이후의 촛불을 대표한다고 나서는 이들이 그들이다.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때늦게 읽은 서병훈의 책은 얀 베르너 뮐러의 공식이 새로운 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포퓰리즘이 치죄(治罪)받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다원성을 핍박한다. 자유를 질식시킨다. 이성적 토론을 차단해버린다. 따라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와 연속성을 띠면서 그 미비한 것을 보완해준다는 평가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불연속적인 것으로 민주주의의 퇴행을 유발하는 위험스러운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한국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김대중 정부부터이며, 이 용어가 극성을 부린 때는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다. 지금도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포퓰리즘 정권이라고 말하는 언론과 학자들이 있는데, 얀 베르너 뮐러의 공식에 따르면 두 정부는 포퓰리즘 정권과 아무 상관없다. 두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시나 같았던 반공주의를 해체하려고 노력했지, 그것을 대신하는 유일 이념을 제시한 적이 없다. 서병훈 역시 보수 성향의 언론이 두 좌파 정부의 “여러 부정적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빌려 쓴 것이 그 원인”이었을 뿐,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의회와 정당 등 기존 대의제도를 전면 우회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단언한다. 두 전직 대통령이 의회주의에 충실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 어느 모로 보든 한국 정치사에서 진짜 포퓰리스트를 찾는다면 이승만과 박정희를 손꼽아야 할 것이다.

세르주 알리미 외 34명이 필자로 참여한 〈극우의 새로운 얼굴들〉(르몽드코리아, 2016)을 보면, 유럽의 극우 정당과 포퓰리즘은 가장 큰 교집합으로 연결돼 있다. 대의민주주의보다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한다는 점, 반이민과 반이슬람이라는 증오를 동원해 극단의 정체성 정치를 펼친다는 점, 국민과 비국민을 판별하는 반다원주의 행태에 몰입한다는 점, 그러면서 이질적인 계급 기반을 가진 여러 층의 유권자를 유인하기 위해 ‘위대한 조국’을 내세운다는 점 등에서 극우 정당과 포퓰리즘은 구분이 불가능하다. 포퓰리즘은 좌파를 조롱하는 데 쓰기 좋은 전용 용어가 아니다.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진짜 포퓰리스트와 가짜 포퓰리스트를 가려내기는 의외로 쉽다. 누군가가 ‘현명한 독재’를 기대한다면, 바로 그가 포퓰리스트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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