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3월10일 탄핵 인용 소식이 발표된 직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던 시민들이 경찰 차벽 위로 올라갔다.
5월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법정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 등에 대한 2차 공판이 열렸다. 150여 석 규모의 대법정 방청석이 모두 찼다. 법원 정문 앞에는 태극기를 든 박 전 대통령 지지자와 경찰 병력, 경찰 버스가 뒤섞였다.

같은 시각, 417호 법정 바로 아래 있는 311호 법정에서도 재판이 열렸다. 정호동(가명) 특수폭행치사 등 사건. 언론에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를 사망케 한 60대 버스 탈취범’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이날 재판에서 배심원석만 다 찼을 뿐, 전체 100석 규모의 방청석 가운데 기자 서넛과 법원 관계자 몇 명만 앉아 있었다. 피고인 정씨는 10분가량 늦게 법정에 들어섰다. 판사는 “오늘 법원 주변에 집회가 많고 복잡한 상황이라 접근이 용이치 않은 탓이다”라고 사유를 설명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선고를 내린 지난 3월10일, 서울 안국역 일대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했던 정씨는 또 다른 집회 참석자인 김 아무개씨를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 공소장에는 정씨의 범행 사실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정씨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가 헌법재판소로 가자는 주최 측의 말을 들었다. 길을 막은 차벽을 열기 위해 차문이 열린 채 주차된 경찰 버스를 운전해 방호차 벽을 밀어 틈을 만들었다. 12시12분경부터 12시14분까지 50여 차례 추돌했다. 그 충격으로 경찰차 벽 뒤에 있던 경찰 소음관리차가 크게 흔들렸다. 이 과정에서 경찰 소음관리차 지붕 위에 있던 무게 100㎏가량의 대형 스피커를 고정한 장치가 부서져 스피커가 떨어졌다. 집회 참가자로 마침 그곳에 있던 피해자 김 아무개의 왼쪽 머리와 가슴 부위를 강타하여 사망하였다.’

1951년생인 피고인 정씨는 서른 살 무렵부터 30년 이상 고속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다. 61세부터는 촉탁직으로 시내버스를 운전했다. 현재는 무직이며 기초생활수급자이다. 가족은 없고, 결혼을 한 적도 없다. 사는 곳은 서울시 도봉구 △△동 00-00번지. 단독주택이냐는 판사의 질문에 정씨는 “반지하”라고 답했다.

정씨의 주거지는 지하철 4호선 쌍문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2층 빌라는 반지하에 두 가구, 1층에 두 가구, 2층에 한 가구가 살고 옥탑방이 있는 구조였다. 반지하인 101호와 102호에는 초인종이 없었다. 사망 사건이 발생한 3월10일 저녁 6시30분 정씨는 자신이 살던 반지하 102호에서 긴급체포되었다.

정씨는 지난 2월부터 10여 차례 탄핵 반대 집회에 갔다고 재판에서 밝혔다. 그는 3월10일 상황을 법정에서 진술했다. 탄핵소추안에 대해 각하 내지 기각을 예상했던 정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현직에 있는 대통령은 내란죄나 외환죄가 없으면 탄핵 대상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두 가지와 전혀 관계가 없었는데 인용되었다는 걸 듣고 서운했다. 대통령께서도 전체적으로 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탄핵까지 갈 정도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 실망해서 집에 가려고 전철역으로 향하는데 헌재로 가자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문이 열려 있는 경찰 버스를 보니 키가 꽂혀 있었다. 차벽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법정 진술).” 헌법은 ‘대통령이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제84조)’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탄핵 반대 진영에서는 ‘형사상 소추’가 아니라 ‘탄핵’이 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정보가 통용됐다. 경찰은 사고 직후 ‘정씨가 도주해 집으로 갔다’고 밝혔다. 반면 정씨는 “사망 사건이 발생한 줄 모르고 집회 참가 후 집에 돌아온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씨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이웃 주민들은 정씨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정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바로 옆집인 101호에 사는 이웃은 “내가 여기에 이사 온 지 9개월 정도 되었는데 102호 사는 사람(피고인 정씨)과 말을 섞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1999년 이 동네로 이사 왔다는 또 다른 이웃은 “102호 아저씨가 이곳에서 20년 정도 살았다. 집 앞 골목도 자주 쓸고,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그도 정씨의 이름이나 연락처, 직업은 알지 못했다. 빌라 주인은 “3주 전쯤 정씨에게 전화가 와서 ‘자기가 한동안 방을 비워야 할 것 같다’고 한 뒤 연락이 없어서 궁금해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그는 “정씨가 월세를 제때 안 냈지만 술도 못하고 사람은 괜찮았다.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집에서 긴급체포된 정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갇혀 있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정씨 변호인으로 정준길 자유한국당 대변인이 이름을 올렸지만 재판에 출석하지는 않았다. ‘3·10 항쟁 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김기수 변호사가 실질적으로 변론을 맡았다. 이 진상규명위원회는 탄핵 반대 집회에서 사망한 집회 참가자 3명을 비롯해 부상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탄핵 반대 진영에서 만든 단체이다. 정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특수폭행치사 이외에 특수공무집행방해, 공용물건손상, 자동차불법사용 등 모두 4개다. 변호인은 3개 혐의는 인정하지만 김씨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특수폭행치사는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씨가 피해자에게 직접 폭행을 가한 것이 아니며 스피커 추락을 예측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집회 관리를 맡은 경찰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이를 모두 정씨에게 전가했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변호인 신문 때 “사고 당하신 분과 유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하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라고 말했다.

이날 재판에는 스피커가 떨어진 소음관리차를 운전했던 전북지방경찰청 김 아무개 경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씨가 경찰 버스로 차벽을 들이받을 당시 소음관리차 안에 있었던 김 경사는 “스피커가 기울어진 걸 보기는 했지만 떨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차가 심하게 흔들려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했다”라고 진술했다. 김 경사는 기울어진 스피커를 내려 차 안으로 넣거나 하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

검찰이 징역 3년을 구형하자 고개를 숙인 정씨가 숨죽여 흐느꼈다. 정씨는 최후진술에서 눈물의 의미를 설명했다. “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죄에 대해 벌을 달게 받겠다. 제가 흘리는 눈물은 첫째, 검사님이 형을 약하게 해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이고 둘째, 박근혜 대통령님이 빨리 석방되셨으면 좋겠다는 의미이다. 이상입니다.”

이날 배심원 7명 가운데 3명은 징역 3년, 다른 3명은 징역 2년, 1명은 징역 1년이 적당하다는 양형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배심원 의견과 죄질 등을 고려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날 배심원들은 쟁점이 되었던 특수폭행치사죄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 의견을 냈고, 재판부도 이 혐의는 무죄로 보았다. 정씨는 판사와 검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법정을 떠났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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