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무식꾼임을 드러낸 식견과 당최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언행으로 제45대 미국 대통령직을 꿰찬 도널드 트럼프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선거 직후 쏟아진 흔한 해설은 하나같이 러스트 벨트(Rust Belt: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쇠락한 공업지대)의 반란을 주워섬긴다. 1970년대까지 그럭저럭 성황을 이루었던 이 지역의 제조업이 몰락하면서 속출한 백인 실직 노동자들이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에 호응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유색인 인종차별을 해명하지 못한다. 저런 모자란 해설은 제조업 쇠퇴 현장에서 우선적으로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유색인종(특히 흑인)이었는데도, 이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던 백인의 공격 목표가 된 까닭에 묵묵부답이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펴냄
1962년에 출간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교유서가, 2017)는 이제야 번역되었다는 뜻에서 늦게 온 명저이지만, 미국에서 트럼프 같은 막말꾼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적시에 나온 신간이라고 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선거 유세 기간 중에 튀어나온 트럼프의 막말이 실언이기는커녕 반지성주의라는 미국 풍토에 최적화된 맞춤 발언이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실제로 트럼프의 반지성주의는 유권자들의 열광 요소이지 감표 요인은 아니었다.

근대에 생겨나 현재까지 존속한 제국 가운데 종교적 열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국은 없다. 유독 미국만 종교적 열망이 건국으로 이어지고 제국이 된 유일한 사례다. 이후 이스라엘만이 신정일치 국가 건설에 성공했고, 이들을 따라하려 했던 이슬람국가(IS)는 현재 괴멸 일보 직전이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종교국가라는 그 특수성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선 반지성주의를 미국 종교사의 틀 안에서 탐구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개신교의 제도에 따라 형성된 개신교 국가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기독교 역시 ‘믿음(감정)이냐, 앎(지성)이냐’라는 각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기독교 사회는 언제나 지성이 종교 안에서 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지성을 감정보다 아래에 두거나 감정의 명령에 따라 사실상 무시해버려야 한다는 양 축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렇듯 감정과 지성 간의 긴장이 있기는 했지만, 청교도가 대서양을 건너오기 전에는 전자가 후자를 제어했다. 하지만 영국을 떠난 청교도는 신세계라는 색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신세계 주민은 구세계(유럽)의 모든 것과 절연하기를 원했다. 개척지에 내던져진 미국인은 왕정도 귀족도 없는 평등주의에서 출발했다. 일체의 평등주의는 미국 정치를 결정했을 뿐 아니라, 미국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먼저 신세계의 청교도들은 성직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지성은 감정보다 못한 것으로 격하되었다. 학식 있는 목사와 신학이 거부되고 그들이 쫓겨난 설교대를 성서도 읽을 줄 모르는 평신도와 연예 사업가나 다름없는 부흥 전도사가 차지했다. “종교적 민주주의”로 용인된 미국 개신교 안에서의 반지성주의는 미국인을 원시적인 마니교도(이들은 세상을 선과 악의 전쟁터로 본다)로 만들고 미국 교회를 감정의 발산장으로 이끌었다. 한국 대형 교회 목사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화려한 몸짓과 상스러운 언변, 정교한 ‘스타 시스템’에 의지한 복음주의는 한국 전통 샤머니즘보다 미국 개신교가 모범이다.

개신교가 미국 반지성주의의 온상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2004)은 호프스태터가 여러 복합적 원인 가운데 개신교를 미국의 반지성주의 온상으로 지목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새삼 강조한다. 원제가 ‘Who Are We?’인 이 책에서 헌팅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기본 주제는 미국의 국가 정체성에 앵글로-개신교도 문화가 계속해서 중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호프스태터는 1930년대 이후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가 미국 정치에서 극우파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으며, “열성적이고 종교적인 신앙과 정치적·인종적 증오 사이에는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라고 말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인종차별과 배타주의는 미국의 앵글로-개신교도가 선택받은 신의 백성이라는 신념에서 나온다.

미국이 국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딜 무렵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높은 지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 후의 미국 정치사에서 지식인은 전문가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했고, 미국 유권자들은 지식인인 양하는 지도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미국 사회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반지성주의는 미국 청교도 문화에 타고난 평등주의와 실용주의, 개척(전쟁) 문화와 기업 문화가 합해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가 엮은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이마, 2016)에 글 한 편을 보탠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에서 반지성주의가 극성을 부리게 된 시기를 거품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1990년대로 잡는다. 거품경제의 붕괴는 중산층 사회를 양극화로 몰아넣게 되는데, 중산층의 양극화에 대한 저항은 극히 모순적이게도 국체(國體:천황)로의 귀의나 일본 역사에 대한 존숭으로 나타난다. 양극화의 벼랑에 선 중산층은 신자유주의 정부에 더욱 협조적이면서, 주변인(소수자)·노동조합·외국인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이런 현상은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겪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화의 진전 속에서 반지성주의가 광범위하게 만연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반지성주의는 공통적으로 반공과 레드 콤플렉스를 품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이면서 분단국가인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거기에 더하여 종북과 반미라는 무기마저 장착했다. 그러나 이번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종북과 반미는 예전처럼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번 선거에서 더욱 표 나게 드러났듯이, 오히려 걱정해야 할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지식인의 자기 훼절이다. 지식인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면서 그의 당선을 비는 것은 자신의 시민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선거 유세 기간 중에 발설한 말을 보면, 모두 한 입으로 두말하는 형국이다. 예컨대 ‘민주와 인권’ 혹은 ‘정권교체와 인권’ 가운데 전자는 후자보다 더 큰 개념이라면서, 문재인 후보의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편들었던 허다한 시인·작가·신학자·역사가가 그렇다. 당파에 매몰되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기기만은 안철수나 심상정을 지지했던 이들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한 번씩 선거를 할 때마다 지식인은 반지성주의라는 장도로 자신을 난자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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