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꺼림칙했지만 아빠가 만난 보안과 형사는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진솔한 회고담을 들려주었어. 체포하거나 취조해본 사람 가운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서울대 82학번 조 아무개 학생을 들었지.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는데 사연을 맞춰보고 이리저리 알아보니 그 형사의 기억 속 학생이 조정식이라는 이와 맞아떨어진다는 알게 됐어. 오늘은 아빠가 만난 보안과 형사 기억 속의 조정식에다 그 뒤 아빠가 접하게 된 조정식의 사연을 덧붙여서 늙은 보안과 형사의 목소리에 실어보고자 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82학번이었어. 난 법대생으로 알았는데 물리학과라더군. 나랑 인연이 된 계기는 1985년의 ‘반제동맹’ 사건이었어. 서울대 제적·휴학생들을 중심으로 노동 현장에 침투해 활동하면서 노동운동 관련 제적 학생들을 규합, 5월 말경부터 북괴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한 ‘반제동맹당’을 결성(〈동아일보〉 1986년 11월12일)한 사건이지. 정식이도 그때 체포됐어. 경기도경으로 끌려왔는데 무지 고생을 했을 거야. 그때도 그 유명한 이근안이 붙어서 험하게 다뤘거든.
조사하다가 밥을 주는데,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 동작으로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뭐라고 해야 하나. 누구 보라는 시위는 아니었고 자기 자신한테 하는 다짐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참 말이 없는 놈이었어. 주변을 조사해보니 뭐 의식화 같은 작업을 활발하게 하지는 못했다더군. 그렇게 수줍어하는 성품이었대. 위장 취업을 해서 근로자들을 선동하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능청을 떨 구변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야.
잡혀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 하지만 걔는 진짜 말 한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 만만찮은 놈이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게 느껴지더라고. 좀 말을 시켜도 한마디도 안 해. 마치 벙어리처럼.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과묵한 녀석이 시위 현장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다가 경찰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도망치기는커녕 쩌렁쩌렁 연설을 해서 주변 시민들이 들고일어나게 만든 적도 있었다는 거야.
평생 막노동하며 식구를 부양했던 아버지를 존경하고 가족들에게도 끔찍한 순둥이였대. 걔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야.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저는 아직 아버님께 못난 아들입니다. 집안의 장남이면서도 아버님을 그 머나먼 땅에서 고생하시도록 만들고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지만 온갖 슬픔과 고통을 주었던 점에서 저는 못난 아들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저는 불의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굽히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서울대저널〉 132호).’
형을 살고 나왔다든가 집행유예로 나왔다든가 정식이가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공장에 갔다는 정보는 듣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딱 부평역 앞에서 정식이하고 마주친 거야. 덥석 팔을 붙잡았지. 체포한 거냐고? 아니,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 그 가난한 노동자 아버지가 장남 서울대 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 잔치를 해도 2박3일 할 일이지. 그런 애를 내 손으로 잡아넣었는데 겨우 출옥해서는 학교로 안 돌아가고 또 다른 공장에 갔다니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 나중에는 빌다시피 했어. 너 잘된 뒤에 하고 싶은 일 하고 지금은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고.
그런데 애가 참 착한 게 나한테 대들지도 않고 묵묵히 그 말을 들어줬어. 자기 잡은 형사한테 욕이나 하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라비틀어진 손목에 꾀죄죄한 물색에 얼굴은 반쪽이 되어서는 끄덕끄덕 들어주더라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까지 하는데 참 가슴이 아팠어. 마치 내가 자기 삼촌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전하게 자기 인생을 걸었던 젊은이들
그때로부터 한 몇 달이 지났나. 누군가 조정식이 얘기를 전해주더군. ‘반제동맹 사건 조정식 알지?’ 하면서. 아 글쎄 죽었다는 거야. 서울 성동구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선반 작업 도중에 기계 균형 맞추려 고정시켜놨던 추가 별안간 튕겨 나와서 뒷머리를 때려버렸다는 거야.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대. 1964년생이니까 그때 만으로 스물다섯 정도나 됐나.
밥 먹기 전에 팔을 뻗어 주먹을 쥐면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평역 앞에서 ‘짭새(걔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지)’ 아저씨 훈계 들어주면서는 또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 순둥이가 왜 그런 열렬한 투사가 돼서 내 손에 잡히고 이근안한테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야 했을까. 왜 그냥 보기만 해도 찬란한 젊은 나이, 가족 생각을 그리도 끔찍이 하던 순둥이 정식이를 투사로 만든 이유는 뭐였을까. 잡다한 이유도, 다양한 배경도 많겠지만 그건 다름 아닌 전두환이었어.
정식이는 대구 출신으로 1980년 광주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지. 대학 와서 광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몰래 몰래 전해진 광주 관련 기록들을 보면서 소스라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땅을 치고 통곡했던 거야. 어디 걔뿐이겠어. 당시 운동에 뛰어든 학생들의 출발은 거의 모두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었어. 물론 비슷한 또래면서도 광주가 뭐냐 하고 공부만 파던 우병우 같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말이야.
아 또 기억나는 게 있다. 정식이가 나직하게 읊조리던 노래야. 유치장에 앉아서 부르는데 투쟁가 그런 건 아니었고 찬송가 분위기의 운동권 노래였지.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고 했어. 가사를 검색하면 나올 거야.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참된 삶 사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너와 나 함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으며 죽어도 뺏지 못할 자유를 되찾자.’ 보안과 형사로서 걔들한테 나는 독재의 주구 이상은 아니었겠지. 나도 걔들을 이 사회가 용납 못할 적이라고 생각했고 말이야. 하지만 ‘죽어도 빼앗지 못할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정직하고 온전하게 자기 인생을 걸었던 젊은이들에게는 지금이라도 경의를 표하고 싶어. 생각하면 할수록 목이 메고 가슴이 떨려. 그 눈물나게 푸르른 젊음들이 단 한 사람 때문에 뒤틀려버린 걸 생각하면 욕지거리가 솟아나기도 하지. 누군 누구겠어. 전두환이지. 최소한 그 인간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회고록이니 뭐니 하면서 죽어간 사람들 영혼에까지 구정물을 튀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삶을 살려다가 지쳐 쓰러져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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