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당시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돼 있었어. 광주에서는 하늘이 무너졌지만 광주 밖 국민들은 아무도 몰랐단다. 그때는 인터넷도 SNS도 없었고, 신문과 방송도 군사정권이 통제했지. 오늘 네게, 그리고 〈시사IN〉 독자에게 전해줄 편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상을 누리던 국민에게 광주를 대신해 광주의 상처와 비명을 전달하려 애쓰다 죽어간 이의 목소리야.


내 이름은 김종태라고 합니다. 내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집이 워낙 가난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열서너 살에 공장 문을 두드려야 했으니까요. 학교는 초저녁에 포기했어도 공부까지 손 놓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야학에 들어갔지요. 거기서 학교에서 못다 한 공부도 하고, 의롭지 못한 세상의 이치도 알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렴풋한 윤곽을 그려내기 시작했죠.

1980년 당시 나는 방위병이었어요. 6월16일 제대였으니까 그해 광주에서 피바람이 일던 무렵이라면 방위병 말년의 여유를 즐기며 주변 친구들과 함께 조직한 ‘조나단 독서회’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고 있었을 겁니다. 군 제대 후 성인으로서 가정도 꾸리고 어머니도 편하게 모실 궁리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천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천둥의 진원지는 다니던 교회에 찾아온 한 낯선 사람의 강연이었어요.

ⓒ연합뉴스4월20일 광주민주화운동 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연희동 전두환씨 자택을 항의 방문해 ‘전두환 회고록’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는 며칠 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었지요. 대한민국 군인이 곤봉으로 수박처럼 사람의 머리를 터뜨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아 죽였다? 정확한 숫자도 모를 사람들이 스러져갔고 아이들까지 희생됐다? 군인 신분이던 나는 울컥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딱히 그 증언자를 불신했다기보다는, 내가 투철한 군인이었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그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다 날조된 증언이오. 어떻게 이런 선동을 하고 다니는 거요?” 그러는 내게 증언자는 울부짖듯 소리쳤지요. “광주에 내려가 보시오. 병원마다 죽은 사람, 다친 사람이 그득할 거요. 가보시오.”

그러는 와중에 또 한 소식을 듣게 되죠. 내가 교회에서 광주 관련 증언 번갯불에 온몸이 관통당하기 하루 전날, 5월30일 김의기라는 서강대 학생이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했다는 거였어요. 그는 광주의 비극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그대로 6층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지요. 누군가 전해주는 그 유인물 내용 한 자 한 자가 귀에 박힙디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도 믿어지지 않았어요. 결국 제대를 보름여 남긴 방위병,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과 성남에서만 살았던 나는 어렴풋한 이름으로만 들었던 광주, 빛고을에 내려가게 됩니다.

ⓒ성남일보고 김종태씨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방위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기차 안에서 “그럴 리가 없어”라고 얼마나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 헝클어졌지요. 그럴 리 없어, 그러지 않아야 해. 만약 그랬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어지러움은 광주에 발을 딛는 순간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이라는 괴물이 짓뭉개버린 광주 곳곳에서는 가시지 않은 피비린내가 났고 오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은 옷에 가려져도 훤히 보였습니다. 대충 땅을 파고 덮어버려 관 속에서 손이라도 튀어나올 듯 엉성했던 망월동 묘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만든 독서회 이름의 주인공인 성경 속 ‘조나단(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던가요. “내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아, 용사들은 쓰러지고, 무기는 사라졌구나(사무엘하 1장).” 그 구절을 되뇌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흐느꼈습니다. “여러분은 쓰러졌는데 나는 무얼 해야 합니까.” 그때 머릿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리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알려야 한다.’ 내가 강연자를 믿지 못했듯 서울 사람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가서 전하자. 내 눈에 문신처럼 새겨지고 귀에 대못으로 꽂힌 참극을 생생하게 전하자.

서울에 돌아온 나는 와들와들 떨리는 팔다리를 겨우 가누며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보게 하기 위해 종로나 신촌 등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서 흩날려봤지만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고 신문에는 한 줄도 나지 않았습니다. 되레 머지않아 미스유니버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만 요란했지요. 수백명이 살해된 마당에 세계 미녀들을 모아놓고 축제를 열다니, 유인물을 뿌리고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나는 신문을 갈기갈기 찢으며 분노했습니다.

수백명 살해된 마당에 미인 대회라니

1980년 6월9일 저는 여느 날처럼 밤새 쓰고 타이프를 치고 등사기를 밀어 작성한 유인물을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번 유인물은 특별했습니다. 특히 그 마지막 구절에서는요. 글자 하나 쓰면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침표 하나 찍으면 앞으로 하고픈 일, 해야 할 일들이 시나브로 번져왔으니까요.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불싸질러) 광주 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이 민족을 위해 몸을 던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 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서 몸을 던집니다.” 유인물을 신촌 네거리에서 대놓고 뿌리자 거리에 서 있던 경찰들이 달려들었고 나는 가지고 있던 기름을 온몸에 뿌리고 불을 댕겼습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쳐다보았지요. 타들어가는 목청을 쥐어짜 구호를 외쳤습니다. 제발 이걸 읽으라고. 광주의 비극을 마주하라고 악쓰고 싶었지만 불길 앞에서 사람의 육신은 약하게 바스러지더군요. 그렇게 나는 죽었습니다.

광주항쟁을 두고 전라도 사람들이 무기 들고 나대다가 일어난 것 아니냐는 사람도 일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분들에게 제가 이승에서 배웠던 모든 욕을 다 쏟아붓고 싶습니다. 이것들 보시라고요. 나는 부산 출신이고, 나보다 먼저 광주를 고발하며 투신했던 김의기는 경북 영주 출신이었단 말입니다. 광주는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 인간과 비인간의 문제였단 말입니다. 하물며 내가 죽어가면서도 잊지 못했던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이랬다지요.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의 야욕 때문에 죽어간 수백 광주 영령과 그 참극 앞에서 살아갈 자신을 잃어버리고 우리들의 미래를 던져 세상 사람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죽어간 김의기 그리고 내 영혼 앞에서 어찌 그리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요.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겁니까.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죽어갔던 겁니까. 내 죽음은 이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겁니까.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서글프지만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후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저는 그렇게라도 알리고 싶었으니까요. 내 가슴속 비밀을 그렇게라도 풀지 않았다면 제풀에 속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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