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시사IN〉 제499호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투표 거부자들의 정치적 시민권’이 실렸습니다. 이 글에 대해  펴낸 출판사 안티고네의 한봉희 대표가 반론을 보내왔는데, 그 반론에 대해 장정일 소설가가 다시 글을 보내왔습니다.


내가『시사IN』499호에「투표 거부자들의 정치적 시민권」이라는 글을 쓰면서 언급한 모리치오 비롤리의『누구를 뽑아야 하는가?』(안티고네,2017)는 훌륭한 교양서다. 특히 제19대 대통령 선거 유세중인 지금, 투표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누구를 찍어야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라면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훌륭한 책도 나처럼 투표를 거부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는 마뜩치 않았다. 때문에 모리치오 비롤리를 비아냥댄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좋은 양서를 내는 안티고네 출판사에 폐가 되었다. 응당은 모리치오 비롤리와 나 사이에 비아냥과 반론이 오갔어야 했는데, 출판사가 번거로운 일을 떠맡게 되었다.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
모리치오 비롤리 지음
김재중 옮김
안티고네 펴냄
내 글이 “서두에서부터 사실관계가 잘못되거나 왜곡”되었다는 한봉희 대표의 말부터 바로 잡고 싶다. 한 대표는 내 글 서두에 나오는 “지은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호하다고 말하는데, “제19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받아놓고, 모리치오 비롤리의『누구를 뽑아야 하는가?』를 읽었다. 지은이는 오늘의 대의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하지 못했던 이 책에서 고작 이런 말을 한다.”로 시작하는 서두에서 지은이는『누구를 뽑아야 하는가?』의 저자 모리치오 비롤리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책을 마키아벨리의 어느 저작과도 혼동한 적이 없으며, 어떤 독자도 내 글이 모리치오 비롤리가 아닌 마키아벨리를 비판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 대표는 반론의 말미에 내가 “차선/차악이라는 단어를 끌고”와 “어떤 사람이 훌륭한 후보인가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고자 했던 모리치오 비롤리의 의도를 “혼선”에 빠트렸다고 한다. 다시 말해 모리치오 비롤리의 “책 속에는 차선/차악이라는 단어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대표의 말처럼 책 속에 그런 단어는 안 나온다. 하지만 이 책의 제1장 소제목(「“덜 사악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과 같은 장의 결론(“우리는 투표를 해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후보가 없다면 덜 나쁜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은 책에 없는 두 단어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내가 “차선/차악”이라는 단어로 모리치오 비롤리의 책을 공박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전체 의도가 “어떤 사람이 훌륭한 후보인가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다는 한 대표의 말을 백번 인정한다. 문제는 내가, 훌륭한 후보를 뽑는 것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조언 자체를 불신한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모리치오 비롤리가 “현존하는 정치학자이자 정책가”라면서 그런 그가 “오늘의 대의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하지 못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부연하자면 모리치오 비롤리는 공화주의 이론가이면서 저명한 마키아벨리 연구자로,『누구를 뽑아야 하는가?』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번역된 책이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모리치오 비롤리가 ‘듣보’가 아닌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 책이 퇴락해가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는 대의민주주의가 아직도 쓸 만하며,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람들에게 긴요한 책이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 정치나 현대 정치를 고민하는 학자면 학자일수록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굳이 외국 학자의 이름을 댈 것도 없다. 지난해와 올해 사이의 촛불 정국 때, 한국의 신문 칼럼은 이 주제로 도배되었다). 예컨대 지난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잭 부시가 나오고 민주당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이 지명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알다시피 힐러리의 남편은 제42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었다. 반면 잭 부시는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동생이며, 제 41대 대통령 조지 H.W. 부시의 아들이다. 대통령직을 가족들끼리 농구공 돌리듯 하는 것은 동남아시아 ․ 라틴 아메리카 ․ 아프리카 ․ 아랍 ․ 동유럽 ․ 중앙아시아의 독재 국가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이었다. 정치 후진국에서나 벌어지던 이런 세습 아닌 세습이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갈라파고스,2016)에서 서구 선진국에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런 가족 비즈니스에 “민주주의 왕가”라는 명칭을 달아 주었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와 잭 부시가 맞붙었다고 가정하고, 내게 미국 시민권이 있었다면 나는 투표장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또 힐러리와 도널드 트럼프의 실제 대결에서는 민주주의 왕가를 박멸하고자 트럼프를 선택했을 것이다. 실로『누구를 뽑아야 하는가?』가 조언하고 있는 그대로라면, 모리치오 비롤리는 분명 트럼프보다 힐러리를 ‘덜 사악하고, 덜 나쁜 후보’로 뽑았을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나 힐러리가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은 현상유지적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잘 보고 찍으라!’ 지은이의 조언이 뇌사 상태가 되어버린 대의민주주의의 산소 호흡기 노릇을 하고, 잠재된 정치적 열정을 보수 양당 체제로 흡수하는 깔대기 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나뿐이 아니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의 결론이 그랬듯이, 점점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추첨제(제비뽑기) 민주주의를 실험해보자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는 추첨제 민주주의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에 기권을 통한 후보 불신임 제도를 착안하게 되었다.

기자명 장정일(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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