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한 비열한 공산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은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이를 두고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미군 사령관은 “역사상 보기 드문 주권의 양도”라고 표현한 바 있다. 현재까지도 한국군 작전권은 한·미 연합사령관, 즉 미군 장성에게 귀속되고 있단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분명한 점은 한국군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시작할 수도, 단독으로 수행할 수도 없다는 것이겠지. 당연히 비정상적이고 자존심이 몹시 상할 뿐 아니라 북한이 남한을 ‘미제의 식민지’라고 우기는 근거가 되기도 했어. 그러나 어떤 측면으로는 미국이 전쟁의 열쇠를 쥐고 있음으로써 허다한 남북 간 충돌에도 제2의 6·25(즉 전면전)가 발발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도 있어.
1967년 4월12일 일어난 남북 간 충돌을 보면 당시 휴전선은 낮은 수준의 전시 상황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거다. “북괴(北傀: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뜻)가 휴전 이후 최초로 다수의 병력인 60여 명으로 휴전선을 침범케 한 사건(〈경향신문〉 1967년 4월14일자)”이었는데 북한군 1개 소대가 휴전선을 넘어와 남한 초소를 기습하자 이에 분노한 한국군 7사단은 포탄 585발을 북한 측 지역에 퍼부어버렸어(참고로 2010년 연평도 포격 만행 때 북한이 170여 발 정도를 쐈다). 급기야 1968년 1월에는 북한 특공대가 남한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청와대 턱 앞까지 찌르고 들어온 사건이 발생했지. 박정희 대통령은 사건 당일 미국 대사를 불러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
한반도가 정작 위태로운 순간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 전쟁을 결심하거나 그에 준하는 사태와 마주칠 즈음이었어. 1976년 8월18일, 판문점 인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과 승강이 끝에 도끼에 맞아죽는 사건이 발생해. 이른바 8·18 도끼 만행 사건이지. 휴전 이후 최초로 한국에는 전시에 준하는 상황을 뜻하는 ‘데프콘 3’ 단계가 선포됐다.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버리는 작업이 진행되던 판문점 주변에는 ‘데프콘 2(전쟁 준비 완료 상황)’까지 발동됐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포함한 7함대가 총동원됐고 미국 본토에서 공군 전력이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괌에서 폭탄을 싣고 날아온 폭격기들이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어.
그 엄청난 무력 앞에서 북한도 기가 질리지. 한국군이 미루나무 제거 작전 와중에 북한군 지역까지 넘어가 북한 초소들을 때려 부쉈지만 북한은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어. 결국 김일성 주석이 유감 표명을 하고 미국 측이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면서 1976년의 전쟁 위기는 고개를 숙이게 돼.
이후 최악의 전쟁 위기는 1994년에 왔어. 1994년 6월16일 오전,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는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미국의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민간인들을 뺀다는 건 전쟁이 임박했다는 뜻이야.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평안북도 영변의 원자로 폭격을 결심했고 그럴 경우 한국군과 미군 및 민간인 사망자까지 예상된 시나리오를 세워두고 있었어. 기가 막힌 것은 미국의 결심으로 파국을 맞이할 당사자였던 한국인들은 거의 새까맣게 그 사실을 몰랐다는 거야. 아빠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의 눈은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미국 월드컵에 집중돼 있었거든.
‘귀신이 곡할 일’이란 바로 이런 형국이군
심지어 미국의 ‘혈맹’인 한국의 대통령도 미국 대사가 “미국 민간인들을 소개(疏開)시키겠소”라고 통보하기 전까지는 미국이 한국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쟁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깡그리 몰랐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클린턴에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고 해. “전쟁은 안 됩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죄를 지을 수는 없소.” 그러나 가장 큰 죄는, 그 자신이 정말로 ‘죄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토록 뒤늦게 알게 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 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한국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하고 있었어. 그즈음에 벌어진 한국 대 볼리비아 축구 경기의 시청률은 63.7%로 역대 스포츠 경기 가운데 최고의 시청률로 남아 있단다.
그로부터 또 4반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미국은 또 한번 전쟁을 결심한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4년 당시 북한을 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가능한 한 모든 옵션을 준비”하라고 선언한 가운데 미국 항모 전단이 한반도 근해로 모여들고 있어. 북한에는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훨씬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듯한 김정은 위원장이 버티고 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지. 1994년과 다르다면 우리가 그 위기를 감지해서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겠지만, 전쟁이 미국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는 슬픈 현실만은 벗어나지 못했지. 전쟁이 벌어질 땅은 우리 땅이고 죽어 엎어질 사람들의 태반은 한국 사람인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전쟁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벌어진다는 것, ‘귀신이 곡할 일’이란 바로 이런 형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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