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소설가)

록 스타와 밴드의 평전과 자서전을 나오는 족족 읽었다. 록 음악은 클래식과 재즈로 개종하기 전인 20대 때 좋아했지만 지금은 어쩌다 레드 제플린을 한 번씩 들을 뿐, 이마저도 곧 그만둘 것 같다. 그런데도 록 스타와 밴드에 관한 책을 빠트리지 않고 읽는 것은 추억이 아니라, 음악사회학적 관심 때문이다. 마크 블레이크의 〈Wish You Were Here-핑크 플로이드의 빛과 그림자〉(안나푸르나, 2017)는 제목이 암시하고 부제가 가르쳐주듯이 프로그레시브 록을 완성시킨 밴드 핑크 플로이드에 관한 책이다. 그렇게 좋아한 편은 아니었지만, 1973년에 발표된 그들의 대표작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Dark Side of the Moon)〉에는 각별한 추억이 있다. 이 앨범에 실려 있는 ‘온 더 런(On The Run)’은 1980년대 초에 발매되었던 한국 라이선스 뒤표지에 ‘도망중에’라는 한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나는 이 제목에 감전되어 ‘도망중’ ‘도망’ ‘도망중인 사나이’라는 시를 써서 첫 시집에 실었다. 네 연으로 이루어진 ‘도망중’의 첫 연은 이렇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도망중이었다./ 한 사나이는 새침한 여자와 만난다 그녀는/ 예뻤고 그녀는 귀여웠고 도망중이었고/ 사나이는 그녀가 좋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사내는 매일/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지요 붉은 장미를/ 사지요 비 오는 공원에서 기다리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그녀에게/ 구혼을 한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신접/ 살림을 차린다. 그 살림은 도망중이었다.”

ⓒ이지영 그림
록 스타와 유명 밴드의 일대기는 하나같이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첫째, 소위 ‘벽돌책’이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한다. 둘째,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데이비드 길모어가 “웸블리 공연 도중 하품을 했다”처럼 시시콜콜한 얘기가 편집증처럼 나열된다. 그래서 두꺼워진다. 셋째, 성공한 록 스타의 삶과 유명 밴드의 숨겨진 갈등은 서로 호환이 가능할 만큼 비슷하다. 미사일의 속도로 성공한 록 스타의 정식 이름은 ‘세계에서 가장 돈 많고, 인기 많은 마약중독자’다. 비틀스의 해산이 대중성을 좇는 폴 매카트니와 예술성을 좇는 존 레넌의 삐걱거림 때문이었다면, 핑크 플로이드에서는 데이비드 길모어와 로저 워터스가 그 역할을 했다. 어느 밴드도 다르지 않다. ‘도망중’의 두 번째 연이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묻는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아내에게/ 묻는다. 아직 소식이 없어, 왜 그렇지?/ 그날 밤 남자와 여자는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남자와 여자는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아직도야?/ 사나이는 초조해서 유순하고 순한 개 한 마리를/ 사온다. 사나이는 메리라고 부르며 그 개의/ 목을 끌어안는다. 그때 메리는 그 사내의/ 강한 팔뚝 속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개 또한 도망중이었다.”



마크 블레이크 지음
이경준 옮김
안나푸르나 펴냄
많은 록 스타는 이혼 가정이나 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혼 가정이나 한 부모 가정의 자녀가 모두 록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많은 록 스타는 아버지나 학교와 불화했지만, 마찬가지로 이들이 모두 록 스타가 되지는 않는다. 하므로 이런 시답잖은 유·청소년기는 앞으로 록 가수의 평전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전기에서 아예 사라지거나 사소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핑크 플로이드의 성공은 로저 워터스에게 절대적인 공적이 있지만, 이들의 성공이 어린 시절 아버지를 전쟁터에서 잃었던 로저 워터스의 불행한 유·청소년기 따위에 비롯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도망중’의 세 번째 연이다.

“한 사나이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의 뺨을 한 대 갈긴다./ 기분이 언짢아 갈긴다. 아내는 울음을/ 참고 따진다. 메리가 누구예요, 메리가 대체,/ 메리가 누구냔 말예요? 사나이는 대답/ 하지 않는다. 그제서야 아내는 운다./ 한구석에 구겨져서 조용히 운다. 울며/ 아내는 짐을 싼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요/ 아내는 짐을 싼다. 깨끗이 끝장내기로 해요./ 그러기에 두 사람이 함께 도망 다니는 일은 힘이/ 든다. 그들은 이제 따로 도망하기로 한다.”

핑크 플로이드의 성공 비결은 여러 록 가수들이 즉흥적이거나 인기 전략의 일환으로 차용했던 반체제와 문명 비판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구사했으며, 그것이 믹 재거(롤링 스톤스)나 로버트 플랜트(레드 제플린) 같은 섹스 심벌을 전면에 내세운 여타의 밴드와 확실한 차별점을 만들었다. 개인기를 가진 섹스 심벌이 없었기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는 자신들의 문명 비판적이고 반체제적인 가사를 ‘시적 구조를 갖춘 대곡’으로 다듬은 다음, 엄청난 물량을 투여한 볼거리 풍성한 공연과 결합시켰다. “핑크 플로이드는 지상 최고의 극작가다”라는 평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1979년에 발표된 두 장짜리 록 오페라 앨범 〈더 월(The Wall)〉로 확실히 증명되었다. ‘도망중’의 마지막 연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태어난다. 도망 중에/ 무관심 중에, 고대 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어떤 시간 중에, 불어오른 메리/ 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사나이는 돈을 지불/ 한다 돈을 준다. 메리는, 내가 키우겠어요./ 요만큼 가지고는 어림없어요! 물론 사내는/ 좀 더 준다. 그리고 아카시아 향에 젖은 아이/ 무죄에 싸인 아이와 홀로 산다. 살며/ 사나이는 발가벗은 아이의 몸뚱이를 꼭 껴안아/ 자기 귀에 대어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여리게 들린다./ 확, 확, 확, 확, 확, 아이는 저 혼자 도망하고 있었다.”

〈더 월〉은 음반으로 만들어진 후, 연이어 같은 이름의 공연과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앨범과 공연은 시적 구조를 가진 정치적 서사와 “‘음악’이 ‘쇼’에 압도”될 정도의 연극적 연출이 합해진 핑크 플로이드의 결정판이다. 반권위주의·반전체주의·반전 구호로 가득한 이 앨범이 세계적으로 히트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핑크 플로이드는 이 앨범으로 또 한 번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게 되는데, 이들이 거둔 수입은 체제를 비판하면 할수록 돈더미가 높게 쌓이는 록 세계의 전형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더욱 재미난 사실은, 돈의 노예가 된 세상을 비판했던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으로 돈방석에 앉게 된 핑크 플로이드가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 총소득을 여러 회사로 분산 투자하는 과정에서 생긴 재정 파탄을 시급히 막을 목적으로 이 앨범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의 공연장에 마스코트처럼 떠 있는 거대한 돼지 인형은 세상뿐 아니라, 어느덧 쓰디쓴 자기 조롱마저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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