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을 받은 건 기병대 사령관 루컨 경. 당시 경기병대는 바로 1분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어. “경기병대는 러시아군이 공격해올 때에만 방어한다”라고 루컨이 명령했기 때문이야. 총사령부에서 온 연락장교 놀란 대위는 무능한 기병대 사령관에게 분통이 터졌나 봐. 저지대에 있어서 전황을 살필 수 없던 루컨이 “대포가 어디 있다는 건가?”라고 묻자 “대포는 바로 저기 있소!” 하고 벼락같이 소리를 질러댔으니까. 그런데 그의 손가락은 전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어. 탈취당한 영국군 대포가 아니라 러시아군 포병대가 삼면으로 배치돼 있는 계곡, 노스밸리였지(열받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실수인지는 영원히 모른다. 그는 곧 전사하니까).
루컨 경과 카디건 경은 처남 매부 간이었지만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어.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야. 보통 처남 매부 사이면 “처남 이게 말이 돼요? 알아나 봅시다.” “그러게 매부 이상하지?” 이렇게 진행됐을 텐데 둘은 그런 논의조차 못할 만큼 사이가 틀어져 있었어. “카디건 경, 경기병대가 노스밸리로 진격하라. 중기병대가 뒤를 따를 걸세.” 루컨이 명령했어. 이게 크림전쟁 발발 후 루컨이 카디건에게 처음 건넨 말이라고 해. “두 백작이 서로 증오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서로를 내려다보는 대신 의논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경기병대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에릭 두르슈미트 지음, 세종서적 펴냄).”
러시아군과 근처에 있던 프랑스군, 튀르크군 그리고 영국군이 모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영국군 기병대 600여 명은 죽음의 돌격을 감행해. 명령을 내린 사람도, 명령을 받은 사람도, 공격을 하는 영국군도, 수비하는 러시아군도 왜 이 돌격이 이뤄진 건지 이해를 못하는 가운데 수백명이 죽었어. 무능함과 무모함과 무책임이 빚어낸 참사였지만 최전방 지휘관이자 처남 매부 간인 두 사람의 사이만 좋았어도, 아니 말이나 붙여볼 사이였어도 막을 수 있는 일이었지.
그로부터 60년을 건너뛰어 동유럽으로 와보자. 제1차 세계대전의 초입,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상대하고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와 맞서야 했어. 러시아군은 잘 싸웠어. 독일군 총사령관 몰트케가 서부전선에서 군대를 빼내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야 했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지. 당시 공격에 나선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은 1군과 2군이었어. 1군 사령관은 렌넨캄프, 2군 사령관은 삼소노프라는 사람이었어. 두 부대의 힘을 합하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포위 섬멸하기에 충분한 역량이 있었지. 그런데 독일군은 기이한 반격을 펼친다. 러시아군 두 개 부대 중 삼소노프 부대에만 총공세를 퍼부은 거야. 러시아 1군이 2군을 도와 독일군의 배후를 찌른다면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지만 독일군은 렌넨캄프가 지휘하는 1군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삼소노프의 부대에만 달려들었지. 신통방통한 건 러시아 1군 역시 최면에 걸린 듯 2군을 도우려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독일군 참모 호프만 대령은 상관들에게 단언하고 있었어. “절대로 렌넨캄프는 삼소노프를 돕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로부터 10년 전 러일전쟁 당시 발생한 해프닝이었어. 그때도 삼소노프와 렌넨캄프는 인접한 부대의 사단장으로서 전투를 지휘했는데 삼소노프의 부대가 악전고투를 치르는 동안 렌넨캄프가 별 도움을 주지 않았어. (원래 사이가 안 좋았는지) 이를 박박 갈던 삼소노프는 우연히 렌넨캄프를 마주친 길에 다짜고짜 분노의 뺨따귀를 날려버렸고 두 장군은 참모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데굴데굴 구르며 육박전을 벌였지. 독일 호프만 대령은 러일전쟁 참관 무관으로서 현지에 있었고, 장군들이 벌인 볼썽사나운 활극 소식을 머릿속에 넣어두었어. 그런데 10여 년 뒤 신기하게도 이 두 장군이 또 인접 부대의 지휘관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담한 작전을 짠 거야. 이 도박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어. 삼소노프 부대가 근 13만명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하고 삼소노프가 자살을 하기까지 렌넨캄프는 움직이지 않았어. 독일군은 휘파람을 부르며 속 좁은 렌넨캄프의 부대마저 탈탈 털어버렸지. 전사자 12만명. 포로들까지 합치면 거의 40만명의 러시아군이 녹아 없어졌어. 이게 1차 세계대전사에 유명한 타넨베르크 전투야.
감정의 부스러기가 역사의 진로 바꾸기도
자신의 나라 운명과 수천만 국민의 염원과 수십만 부하의 생명이 걸린 전투를 지휘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장군들이라면 10년 전에 맞은 뺨 한 대 같은 건 깃털처럼 날려버려야 마땅할 거야. 감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자신하면서도 10년 전의 뺨 한 대, 또는 얼키설키 생긴 서운함과 적대감을 꼬깃꼬깃 접어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 펼쳐 보이는 지질한 존재가 사람이기도 해. 역사는 거대한 이념이나 거창한 대의를 곧잘 앞장세우지만, 말하기에도 민망한 질투·시기·원망·미움 같은 감정의 부스러기들에 의해서도 즐겨 진로를 바꿨어. 말도 안 섞는 처남과 매부가 합작한 발라클라바와, 뺨 한 대가 부른 악연이 수십만을 죽였던 타넨베르크는 그 허다한 예의 하나일 뿐이야.
지난겨울의 촛불의 바다, 그리고 극적인 대통령 탄핵을 거쳐 민주공화국임을 입증한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정당의 후보가 뽑히는 경선 와중에 시퍼렇게 날선 말의 칼과 문자 폭탄들이 횡행하며 서로를 ‘질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지. 다행히 경선이 끝난 뒤 패한 후보들은 기꺼이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아빠는 무슨 적이라도 때려잡을 듯 가죽을 벗기니 패륜이니 떠들던 이들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의에 공감하더라도 차후 저런 작은 상처들이 어떻게 도질지 모르는 것인데 말이야. 역사를 보며, 또 그것을 거울삼아 오늘을 보며 명심했으면 좋겠어. ‘큰 방죽은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는 속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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